Wednesday, September 25, 2019

그녀의 정신세계 #6 (단합대회)

"내과 단합대회 일정입니다."
 3년차가 내민 용지를 받아 검토하는 경진의 얼굴은 늘 그렇듯이 고요했다. 휴가철에는 환자도 약간 뜸했기 때문에 교수들이 여름 휴가를 떠났을 때 레지던트끼리 단합대회라는 명목으로 2박 3일간 여행을 떠나곤 했다. 해마다 있어왔던 전통이라 그도 주르륵 훑어보고 사인을 해 주려 했다. 그런데 맨 마지막에 쓰인 당직란에 그의 눈길이 갔다.
 금, 토요일 당직- 김설종, 반항아.
 토, 일요일 당직- 김진우, 이영식.
 "1년차들에게 당직 맡기려고?"
 "네, 그렇습니다만."
 3년차의 대답에 치프의 표정이 못마땅함으로 살짝 굳었다. 턱을 매만지던 그는 사인을 해 주지 않고 그대로 용지를 내밀었다.
 "2년차들로 바꿔."
 "하지만 작년에도 1년차가....."
 "교수님들도 휴가가신 마당에 1년차들끼리 둬서 사고라도 터지면 누가 책임질 거야?"
 경진이 짜증스레 대답하자 3년차는 어쩔 수 없이 서류를 받아들고 의국을 나갔다.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그의 귀를 괴롭히는 목소리가 있었으니.
 "그래. 가진 무기가 치프, 달랑 그거 하난데, 맘껏 휘둘러라."
 경진이 불쾌한 표정으로 동욱을 돌아보았지만, 의자에 기대 볼펜을 빙글빙글 돌려가며 저널을 읽던 그는 태연히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왜 째려 봐? 잘했다고 칭찬한 거야."
 뭐라 할 듯 경진의 입술이 달싹거렸지만 그뿐이었다. 동욱과 말싸움을 시작하면 무조건 자신에게 불리했다. 동욱은 화술의 달인이었고 경진은 침묵의 달인이었다. 동욱이 화려한 말솜씨로 그를 제압하면 경진은 무조건 무시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두 사람 사이의 싸움은 늘 그렇게 막상막하였다. 어색한 분위기를 견디다 못한 경진이 벌떡 일어나 의국을 나가자 혼자 남은 동욱은 아까부터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던 저널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자식이, 떠밀어 줘도 못 먹네. 콩알만 한 거 하나 못 꼬셔서 아주 똥줄이 타는 구나."
 설종에게 대시해도 괜찮으냐는 공격까지 해가면서 억지로 밀어붙여 줬건만 둘 사이는 여전히 지지부진했다. 그래도 경진이 설종을 대하는 태도가 요즘 훨씬 나아진 것을 느끼며 약간은 안도하는 동욱이었으나 어딘가 '초큼' 부족했다. 마음에 안 들었다.
 "단합대회라........."
 좋은 구실이 생겼는데 어떻게 둘을 붙여줄까 하는 것이 미션 임파서블이었다. 좋아도 미적댈 줄밖에 모르는 경진이 시간이 갈수록 쪼다로 보였다. 친절히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여태껏 제 마음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거라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자신이 또 설쳐야 하나.
 '귀찮은데 그냥 둘이 합방시키고 문이나 잠가버릴까?'
 어쩌면 그것도 썩 괜찮은 방법일지도 몰랐다. 끌리는 남녀가 밀폐된 공간 안에 있으면 무슨 일이 생겨도 생기는 법이니. 이런 저런 생각에 빠졌던 동욱은 머리를 털고 다시 저널을 들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다.
 잠시 설종의 맑은 눈동자가 그의 마음을 스쳐갔다. 밝고 다정한 아이였다. 그 아이가 특유의 친화력과 따스함으로 경진을 다시 웃게 해 준다면, 그 무섭던 겨울에서 빠져나오게 해 준다면 자신은 무엇이든 내어놓을 수 있었다. 과거의 어두운 기억이 떠오르자 그의 손에 꽉 쥐어진 볼펜이 부러질 듯 세게 굽어졌다.

 "웬일이니, 웬일이니! 정말 우리 1년차도 놀러 가는 거야?"
 "치프 샘이 그랬다잖아. 2년차 당직 박으라고! 아싸!"
 단합대회 공문이 붙자마자 내과가 술렁였다. 원래 해마다 1년차가 당직을 섰는데, 올해는 2년차에게로 넘어가자 덕분에 2년 연속 단합대회 당직을 서게 된 2년차들의 표정이 살벌했다. 맘 같아선 좋아서 펄쩍펄쩍 뛰고 싶었던 1년차들이지만 2년차 앞에서 눈치를 보나라 일부러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나중에 당직실에 1년차들만 남았을 때야 박수를 치고 흥분하기 시작했다.
 "어디로 간대?"
 "강원도 영월. 내과 단합대회는 해마다 럭셔리하기로 유명하대. 교수님 찬조에 의국비 남은 것까지 몽땅 쏟아 붓는댄다."
 "동강 래프팅도 한다니, 아, 잠이 안 올 것 같아!"
 "작년에는 밤에 나이트까지 갔댄다. 간만에 발바닥 때 좀 벗겨야지. 크크크."
 다들 그렇게 기대감에 들떠 단합대회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단합대회.
 금요일 오후 병원 앞에 대기한 관광버스를 타고 영월까지 가는 길, 일행은 여행에 대한 기대로 모두들 한껏 들뜨고 즐거운 기분이었다. 반과 함께 앞쪽에 앉은 설종은 음료수와 간식 상자를 들고 버스에 탄 의국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역시 어딜 가서나 각종 서빙과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은 1년차였다.
 "쫑, 너 여기 앉아라."
 맨 뒷자리에 혼자 널찍하게 앉아있던 동욱이 제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턱 짚으며 설종을 불렀다. 그녀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는데, 동욱이 통로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역시 혼자 앉은 경진이 그런 두 사람을 슬쩍 일별했다.
 "샘, 제 자리는 앞쪽인데....."
 "오늘부터 2박 3일간은 오빠라 불러라. 쫑."
 "네? 아하하!"
 "자, 어서 앉아. 우리 함께 오누이의 오붓한 정을 나눠보자."
 동욱의 느끼한 요구에 환하게 웃으며 설종은 그의 옆에 덥석 앉았다. 진짜 오빠처럼 편안하고 다정한 동욱이 요즘 들어 굉장히 친근하게 느껴지는 그녀였다.
 "어떻게 정을 나누실 건데요?"
 동욱의 옆에 앉은 설종이 눈웃음을 가득 담고 물었다.
 "먼저 호칭부터 시작이다. 불러봐, 동욱이 오빠아."
 "하하하, 뭐예요! 너무 느끼하고 기름져요!"
 "어허, 오빠한테 느끼하다니! 자, 다시. 오빠, 동욱이 오빠아. 여기서 부드럽게 콧소리를 넣는 게 관건이야."
 "아하하하하! 큭큭큭!"
 옆자리에서 연방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는 경진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창밖의 광경에 집중하며 듣지 않으려 해도 모든 신경이 그녀의 웃음소리에 가있었다. 그의 이마가 점점 찌푸려졌다. 커다랗게 웃던 설종이 동욱의 목소리를 흉내 내면 그를 불렀다.
 "오빠, 동욱이 오빠아! 이럼 됐어요?"
 "음, 내 이름은 그만하면 됐고, 다음은 이거다. 경진이 오빠!"
 그러자 그때까지 해맑게 웃던 설종의 표정이 금세 흐려졌다. 그녀가 주춤거리자 둥욱이 재촉했다.
 "뭐해? 어서 해봐. 오빠의 친구도 오빠다."
 "에이, 샘! 장난도."
 옆자리에서 턱에 손을 괸 채 창밖만 뚫어져라 보는 치프의 눈치를 슬쩍 살핀 설종이 난처하게 중얼거렸다. 이상하게 같은 4년차인데도 왜 경진의 이름은 편하게 부를 수 없는 건지 이유를 딱 꼬집어 말하긴 힘들었지만 아무튼 설종은 주저하고 있었다.
 "그래. 다 웃자고 하는 장난이지. 그러니 편하게 불러. 어서 경진이 오빠도 불러 줘, 안 그럼 재 삐쳐. 노래방에선 오빠들, 이러면서 잘도 부드더니만."
 동욱이 자꾸 재촉하자 망설이던 설종의 입술이, 첫 소리 '겨'를 발음하듯 살짝 벌어졌다. 동욱뿐만 아니라 돌아앉은 경진까지도 사실 그녀가 정말로 오빠라 불러 줄지 궁금해 그쪽으로 바짝 귀를 기울인 채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런데 저 앞쪽에서 항아가 설종을 불렀다.
 "쫑! 음료수 다 돌렸니?"
 "어, 갈게! 샘 , 잠깐만요."
 다행이다 싶어 설종은 얼른 일어나 앞으로 가버렸다. 그녀가 저 앞으로 사라진 뒤에야 창을 보던 경진이 몸을 반대로 돌리고는 잡아먹을 듯 동욱을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한 대 칠 것 같은 살벌한 표정이었다. 멋쩍게 그 시선을 받아내던 동욱이 어깨를 으쓱했다.
 "장난이잖아. 재미있으라고 한 건데."
 그 말에 경진이 더욱 사나운 얼굴로 노려보자 동욱은 그만 고개를 창으로 돌려 피하고 말았다. 뺨에 와 닿는 따끔따끔한 시선을 느낀 동욱이 겸연쩍게 중얼거렸다.
 "없음 말고. 근데 왜 그리 째려 보냐고."

 단합대회의 숙소로 정해진 곳은 동간 인근의 펜션이었다. 다락이 있는 이 층 통나무집 펜션은 한눈에 보기에도 전원의 향기를 물씬 풍기는 정취 있는 곳이었다. 1,3, 4년차 총 12명이 일행이었는데, 여자는 항아와 설종뿐이라 두 사람에게는 특별히 제일 꼭대기의 작은 다락방을 내어주고 나머지 남자들은 아래층 큰 방 2개에 5명씩 나눠 묵기로 했다.
 "각자 방에 짐 풀고 5시까지 계곡으로 집합."
 시간 약속이 정해지자 항아와 설종은 가파르고 좁은 계단을 타고 오르며 자신들의 방을 찾아갔다.
 "얘, 여기 올라갈 때 조심해야겠다."
 "그러게. 떨어지면 장난 아니겠다. 즉사하는거 아냐?"
 "의사들이 수십 명인데 설마 죽기야 하겠니? 쿡쿡."
 농을 나누며 차례로 계단을 오른 두 사람은 다락방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신 천장이 낮고 좁은 것을 알고 걱정스런 표정이 되었다.
 "쫑, 넌 설 수 있니? 난 못 설 거 같아."
 "이년아! 내 키가 작다고 너까지 괄시하냐? 여기서는 10살짜리 애도 제대로 못 서겠다."
 그나마 지붕의 대들보인 중간 부분은 좀 높았으나 가장자리로 갈수록 시옷자 형태로 낮아지는 천장은 주의하지 않으면 이마를 찧을 것 같았다. 그러나 2년차 선배들이 오지 않아 여자라곤 항아와 설종뿐이었기에 방을 바꿔달라고 불평할 수도 없었다.
 "겨우 두 밤인데 뭐. 꾹 참고 자자. 낮에는 아래층에서 놀면 되지, 뭐."
 "그래. 그러자."
 엉금엉금 기어 다니며 짐을 대충 정리한 두 사람은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녀들이 펜션 현관으로 나가자 3년차 선배들 4명이 기다렸다는 듯 두 사람을 에워쌌다.
 "왜, 왜 이러세요?"
 "아니, 그냥. 같이 가자고."
 항아와 설종 뒤에 건장한 남자들이 두 명씩 호위하듯 붙어 서서 둘에게 계속 걸어가라고 턱짓을 했다. 어쩐지 묘한 느낌이 들었으나 섬배가 가라는 데야 어쩔 수 있나, 둘은 터덜터덜 계곡으로 걸었다.
 저 멀리 보이는 계곡에서는 이미 물놀이가 한창이었다. 진우와 영식은 완전히 쫄딱 젖은 채로 서로를 향해 미친 듯 물을 튀기며 뿌려대고 있었고 다른 4년차들은 그들을 구경하면서 낄낄거리고 있었다. 순간 위험신호가 감지된 설종이 그 자리에 우뚝 섰다. 항아에게 재빨리 눈짓을 한 설종은 순식간에 옆길로 도망갔다.
 "제길, 튄다!"
 "저, 저! 눈치 챘구나, 레비트라 빨리 잡아."
 "왜 그러는 ..........어?"
 무슨 소린지 전혀 감을 못 잡았던 항아는 어 , 어, 하는 사이에 순식간에 선배들에게 팔다리를 잡혀 계곡물에 수평 이동되었다.
 "아아악! 살려 주세요! 샘들, 이러시면 안 돼요."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항아가 온몸을 비틀며 비명을 질렀지만 이미 흥분하여 눈동자에 광기가 흐르는 사내들의 완력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반항하냐? 반항아. 긴장을 풀어. 오빠가 살살 할게."
 "아악! 싫어, 이러지 마아아, 꺄아아아악!"
 풍덩!
 수심 1미터도 안 되는 얕은 물이지만 뼛속까지 으스스하게 느껴질만큼 차가웠다. 얼른 일어났지만 이미 온몸은 완전히 젖어버렸다.
 "아 , 몰라요! 진짜 너무해!"
 항아가 물을 털며 소리를 지르자, 푹 젖은 진우와 영식이 달려들어 그녀를 물귀신처럼 잡아끌었다. 비명을 지르는 것도 개의치 않고 마구 물을 먹이는데 저기서 또 다른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멧돼지처럼 사지가 대롱대롱 매달려 요동을 치는 설종이었다. 어찌나 빨리 도망을 쳤는지 가파른 산중턱까지 뛰어올라가서야 겨우 잡아온 그녀였다. 그녀를 들고 오는 3년차들의 이마와 등이 온통 땀벅벅이었다.
 "아 씨! 놔요, 빨랑! 가만 안 둘 거야! 복수할 거야! 진짜라구우!"
 "넌 조그만 게 어떻게 그렇게 잘 달리냐? 어휴, 더워 죽겠네. 자, 시원하게 해주마!"
 풍덩!
 항아와 똑같은 운명이 된 설종은 입과 코로 물이 쏟아져 들어오자 소름이 끼쳐 죽도록 발버둥을 쳤다. 순순히 잡힌 항아와는 다르게 이 더운데 힘들게 뛰어다니도록 고생을 시켰던 그녀가 얄미웠던 3년차 선배들이 일어나려는 설종의 머리를 틈을 주지 않고 다시 물에 처박았다.
 "어푸! 어푸! 숨을, 못 쉬겠, 꼬르륵!"
 "걱정 마. 여기 심폐소생술이랑 응급구조해 줄 사람 널렸어."
 "좀 더 깊이 넣어줘라. 우리 김 선생 섭할라."
 3년차 네 명에 동기인 진우 영식까지 가세해 설종을 마구 물에 집어넣었다. 아까부터 물 밖에서 그 광경을 웃으며 지켜보던 4년차들이 그 사이 물가로 달아나는 항아를 가리키며 말했다.
 "야, 반항아 도망간다. 뭐하나?"
 "예,예. 지금 만나러 갑니다. 그리운 항아 씨!"
 그렇게 항아는 몇 발 도망치지도 못하고 다시 붙잡혀 물속에서 뒹굴었다. 다른 4년차와 마찬가지로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재미있게 그들을 보던 동욱은, 문득 따그닥 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경진의 손아귀에서 빈 맥주 캔이 무참히 찌그러지고 있었다.
 경진은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듯 이마를 살짝 찌푸리고 있었는데, 그의 시선은 곧장 물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잇는 설종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동욱의 입매가 씨익 늘어졌다. 속이 탈만도 했다. 대놓고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두고 보자니 미칠것이고.
 "쯧쯧, 저러다 오늘 애 잡겠네."
 동욱이 태연하게 말하며 넌지시 경진을 긁어댔지만 그는 그 말에 더 세게 이마를 찌푸릴 뿐 그래도 움직이지는 않았다. 동욱은 속으로 살짝 감탄했다.
 '어쭈, 일단 참아 본다, 이거지? 자식, 넌 자존심 때문에 망할 거다.'
 손아귀의 캔을 완전히 찌그러뜨릴 만큼 초조해 하면서도 끝까지 참던 경진은, 그러나 다음 순간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던 설종이 도망치려 일어섰을 때 뒤에서 진우가 그녀의 허리와 가슴을 양팔로 확 껴안으며 끌어당기고는 함께 데굴데굴 뒹굴자 튕기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기세에 놀란 동욱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를 보았다.
 '얘가 웬일로 흥분을 다 하네.'
 "이제 그만 해라. 애들 감기 들겠다."
 그가 약간 화난 듯 고함치자 머쓱해진 남자들이 그제야 슬그머니 설종과 항아를 놓아주었다. 겨우 자유로워진 몸으로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어 밖으로 기어 나온 두 사람은 세게 기침을 하며 온몸의 물을 털었다.
 "콜록, 콜록!"
 "덜덜덜, 어, 추워!"
 설종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기침을 하자 그녀의 새파래진 입술을 흘끗 본 경진이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수건을 쓱 내밀었다.
 "닦아."
 언제 준비했는지 경진이 내주는 수건을 얼른 받은 설종은 그것으로 대충 얼굴만 닦은 뒤 항아에게 건넸다. 벌벌 떠는 두 사람을 보고 치프가 낮게 말했다.
 "들어가서 옷 갈아입고 나와."
 물을 뚝뚝 흘리면서 숙소로 사라지는 두 사람을 보며 동욱이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렇군! 다른 건 다 참아도 엉뚱한 놈이 손대는 건 못 참는다........이건가?"
 뭔가 심오한 깨달음을 얻은 노인처럼 그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만족했다.
 한여름인데도 숙소로 걸어가는 설종과 항아는 한기에 벌벌 떨고 있었다. 푹 젖은 신발에 흙이 마구 달라붙었다. 축축한 티셔츠를 배꼽에서 한껏 비틀어 짜며 항아가 잘 벌어지지도 않는 입을 열고는 서글프게 속삭였다.
 "괜히 온 것 같지?"
 "내가 미친년이지! 젠장, 잠이나 잘 걸. 뭐가 좋다고 따라 와서는......."
 "쫑, 이대로 참을 거야?"
 "돌았냐? 오늘 밤에 다 죽었어. 두고 봐."
 설종의 눈빛에 날이 섰다. 뿌드득 이를 가는 그녀의 얼굴에는 살기가 철철 흘렀다.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뽀송뽀송한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두 사람은 훨씬 기분이 나아졌다. 밖으로 나오자 어느새 어둑어둑 해진 계곡에 풀벌레 우는 소리가 가득했다. 남자들은 펜션 앞에 만들어진 간이 나무 식탁에 앉아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어, 반 선생, 김 선생. 이쪽으로 와! 밥 먹자."
 아까 물 먹인 일이 약간 미안했는지 선배들이 벌써 바비큐 준비를 다 해놓고 상을 차리고 있었다. 항아와 설종은 골이 잔뜩 난 얼굴로 터벅터벅 그쪽으로 다가갔다.
 평소에는 머리를 항상 똘똘 말아 틀어 올렸던 설종은 이 날 샤워를 하고 말리면서 자연스레 길게 늘어뜨린 상태였다. 저녁 바람에 살랑살랑 나부끼는 설종의 결 좋은 머리칼에 경진의 시선이 잠시 머물렀지만, 그는 못 본 척 고개를 돌려버리고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멧돼지 고기가 야들야들하게 익었다. 어서 먹어 봐. 자 아앙!"
 진우가 갖은 아양을 떨며 들이댔지만 그 정도로 화가 풀릴 리 없는 두 사람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을 하고 외면하기만 했다. 그때 옆의 화덕에서 고기를 굽던 경진이 설종과 항아 앞에 접시를 하나 쓱 내밀었다.
 "자."
 그것은 잘 익은 고기와 김치 구운 것이 수북이 담긴 접시였다. 설종이 돌아보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경진은 그녀를 외면하고 고기를 계속 굽고 있었다. 설종의 꼭 다문 입매가 약간 위로 늘어지는 듯했으나 다음 순간 그녀는 여전히 뾰로통한 얼굴로 되돌아갔다.
 "식는다, 빨리 먹어."
 안 보는 줄 알았더니 낮고도 잔잔한 목소리로 그가 덧붙였다.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리고 발가락 끝이 오므려지는 기분이었다. 그때 동욱이 다른 접시와 젓가락을 몇 개 들고 와서 두 사람 옆에 떡하니 앉았다.
 "그러게 말이야, 내가 애 잡겠다고 그렇게 말렸는데 다들 말을 안 듣더라고. 자. 따뜻할 때 먹어. 어서."
 동욱이 달랬지만 설종이 하얗게 독이 오른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샘도 똑같아요. 말로만 오빠 동생이지, 나 정말 죽는 줄 알았다고요."
 "오냐, 그래. 다들 잘 들어! 앞으로 우리 쫑이 괴롭히면 나한테 죽는다, 알았나?"
 동욱이 다 들리도록 크게 엄포를 놓자 모두들 크게 대답했다.
 "넷!명심하겠습니다."
 "들었지? 자, 젓가락."
 그러면서 동욱이 젓가락을 설종의 손에 쥐어주자 마주 앉은 항아가 볼이 퉁퉁 부어서 못마땅하게 말했다.
 "샘, 너무 차별하신다."
 그 말에 동욱이 눈가를 동그랗게 말며 항아에게도 젓가락을 건넸다.
 "오, 항아 섭섭했나 보구나? 걱정마라. 여동생의 친구도 여동생, 우리 쫑이랑 항아는 오빠가 접수한다."
 동욱의 너스레에 치 소리를 내며 입술이 삐죽거리던 항아도 못 이기는 척 젓가락을 잡고 고기를 집었다. 한참 물에서 허우적댔더니 허기가 장난이 아닌데다 고기가 정말 맛이 있어서 두 사람은 허겁지겁 음식을 먹어 치웠다.
 식사를 마치고 난 뒤 펜션 안으로 들어간 일행은 술판을 벌였다. 한참 그 자리에서 웃고 떠들던 설종은 어느 정도 취기가 돌자 머리를 식히러 밖으로 나왔다. 온통 담배 연기가 가득한 방 안에 있닥 맑은 공기를 마시니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었다. 저 멀리 아까 놀던 계곡에서 작은 모닥불이 피워 진 것을 본 설종은 그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모닥불 앞에 앉은 남자가 동욱인 것을 확인한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샘!"
 설종이 그를 부르자 모닥불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동욱이 고개를 들고 그녀를 보았다.
 "인마, 오빠라니까."
 "헤헤. 뭐 하세요?"
 "도 닦는다."
 "무슨 도요?"
 "불가에 앉았으니 불도를 닦아야겠지?"
 어쩐지 말이 되는 소리에 설종은 쿡쿡 웃으며 엉덩이를 땅에 대고 편하게 앉았다. 밤하늘의 별이 총총 빛나는게 도시와는 사뭇 달랐다. 설종은 작게 헛기침을 했다.
 "저, 샘. 궁금한 거 있는데요."
 "뭔데?"

 "치프 샘 말인데요, 혹시 눈동자 색이 좀 특이한 거 아세요?"
 그 말에 동욱이 가만히 고개를 돌려 설종을 물끄러미 보았다. 쌍꺼풀 없이 큰 동욱의 눈동자가 어쩐지 아련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래. 나도 처음엔 그것 때문에 경진이가 혼혈인 줄 알았어. 그런데 아니래. 어머니쪽 집안 내력이라더라. 조상 중에 외국인이 있지 않았나, 그런 생각까지 해 봤대."
 "너무 신기하지 않아요? 진짜 예쁘더라."
 "그래, 예쁘지.....그래도 그런 말하지 마. 눈 색깔에 관심가지는 거 굉장히 쑥스러워해. 별로 눈도 안 나쁘면서 뿔테 안경 쓰는 것도 그 때문이야."
 설종의 입이 후회로 살짝 벌어졌다.
 '벌써 해버렸다고요! 안 그래도 싫다고 했는데.'
 "나도 너한테 궁금한 게 있는데."
 동욱이 말문을 열자 설종이 모닥불을 뚫어지게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떻게 하면 골 때리게 사랑스러울 수가 있냐? 비법이 정말 궁금하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문장이라서 잠시 두 눈을 깜빡이던 설종은 금세 벌게진 얼굴이 되었다. 잊힌 형님의 향기가 다시 바람을 타고 감도는 듯했다.
 "이런 씨, 반이 가르쳐줬죠, 그렇죠?"
 "아니. 너 몰랐니? 그 형님 편지 내가 코팅해서 소장하는 거. 언젠가 경진이한테도 보여줄 생각이다."
 "네에?"
 설종이 경악했지만 동욱은 태연했다.
 "상당히 빼어난 필력이라 나도 사실 감탄했다. 아, 궁금한 거 또 있다. 어떻게 하면 삭카린보다 달콤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지........"
 "에이 좀, 그만 하세요! 치프 샘한테는 절대 보여 주면 안 돼요, 알았죠?"
 설종이 그의 어깨를 때리며 소리를 지르자 동욱이 크게 하하하 웃었다.
 "그래서 그 형님은 어떻게 됐어?"
 "한 번 찾아왔는데, 진우가 따돌려 줬어요. 지금은 퇴원했어요. 아무튼 안 보여 주기로 약속하는 거죠?"
 "글쎄다, 네가 하는 거 봐서."
 "어우, 뭐예요. 진짜."
 여름밤은 깊어가고 코끝을 간질이는 달콤한 나무 타는 냄새가 정겨웠다. 그때 뒤에서 들리는 낮고 굵은 목소리.
 "여기서 뭐해?"
 웃던 동욱이 고개를 돌아보고는 그것이 경진인 것을 알고 손짓을 했다.
 "어, 앉아라. 지금 김 선생이랑 심오한 인생 상담을 하는 중이다."
 묘한 시선으로 동욱과 설종을 번갈아 보던 경진이 다가와 모닥불 앞에 털썩 앉았다. 자신과 마주 보는 자리에 경진이 앉자 여태 편안히 긴장을 풀고 맘껏 웃던 설종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그가 나타났을 때부터 가슴 속이 쿵쿵거리고 떨리더니 이제는 손끝까지 저려왔다.
 '돌겠네. 왜 이리 심장이 제멋대로 벌떡벌떡 하는 것이여?'
 딱히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경진이 있는 쪽으로는 제대로 쳐다보기가 힘이 들었다. 예전엔 무섭거나 싫어서 피해다녔지만 지금은 그것과 어딘가 조금 다른 이유로 그를 외면하고 싶었다. 그녀가 깨닫지 못한 사이, 언제부턴가 경진을 보게 되면 심장이 콩닥거리기도 하고 아랫배가 싸하게 긴장이 되었다.
 경진은 경진대로 자신이 오기 전에는 활발하게 떠들고 웃던 설종이 갑자기 역력히 싫은 얼굴을 하자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세 사람은 잠시 그렇게 말없이 타는 모닥불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화장실 좀."
 동욱이 부스스 일어나더니 펜션으로 걸어갔다. 졸지에 둘만 남은 형국이 되자 설종의 입술이 타들어갔다. 경진은 여전히 한 마디 말도 없었고, 어색함을 견디기 어려웠던 설종은 차라리 적다한 핑계를 대어 숙소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 중이었다. 그에게 뭐라 둘러대야 하나 망설이던 그녀가 눈을 슬그머니 들었다.
 타는 모닥불 빛을 받아 그의 얼굴 윤곽이 주홍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반듯한 이마와 쭉 뻗은 콧날, 인중이 또렷하고 모양이 좋은 입술까지 차차 내려오면서도 설종은 차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처음 발견하는 경진의 준수한 아름다움에 그녀는 몰래 감탄하고 있었다. 이토록 빛이 나는데 어째서 여태 찾아내지 못했는지 스스로 이해가 되지 않을 만큼 빼어났다.
 그때 경진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그녀의 시선을 마주했다. 불꽃이 넘실대는 가운데 그들의 눈이 얽혔다. 그는 설종의 동그란 눈매와 새카만 눈동자, 곧은 코와 붉고 촉촉한 입술을 천천히 음미하듯 보았다. 누가 그러란 적도 없는데 움직이면 안 될 것처럼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주변의 공기가 흐름을 멈추었다. 모닥불의 온기가 닿는 경계까지만 유효한 마법처럼 두 사람은 세상과 분리된 또 다른 세계에 와 있었다. 그것은 아주 찰나였을 수도 있었고 어쩌면 깨닫지 못했으나 긴 시간이었을지도 몰랐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는 무서운 의국의 선배가 아니었고 그녀는 사고뭉치 후배가 아니었다. 바로 남자와 여자의 이름으로 만나는 순간이었다.
 키스하고 싶다.
 그녀의 살짝 벌어진 도톰한 입술을 보며 그는 그런 생각을 했다. 작고 여린 몸을 한 손으로 휘감아 자신에게 바짝 붙이고는 말랑하고 매끈한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싶었다. 겹겹의 옷 아래 숨은 가슴은 이 손아귀에 넣고 미친 듯이 주무르고 싶었다. 달빛 아래 하얀 도자기처럼 빛나는 저 얼굴이 쾌감으로 일그러지는 모습을 두 눈에 똑똑히 새기고 싶었다. 그때 저 입술 사이로 자신의 이름이 새어 나온다면......
 "가자."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숙소로 몸을 틀었다. 자신의 일그러진 욕구를 그녀에게 한 자락 끝이라도 내보일 수는 없었다. 몇 발짝 뒤에서 따라오는 설종이 부스럭부스럭 자갈을 밟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성큼 걷자 그 소리는 조금 멀어졌고 보폭을 줄이자 다시 커졌다. 그녀와의 마음의 거리도 물리적 거리처럼 뜻하는 대로 조절할 수는 없는걸까.
 "쫑, 빨리 와!"
 "어."
 불을 환하게 밝힌 펜션 앞에서 항아가 손을 흔들었다. 설종이 그를 스쳐 앞으로 뛰어갔다. 뛰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왠지 여태 알던 설종이 아닌 것처럼 낯선 경진이었다.

 그날 밤, 새벽 한 시까지 계속되었던 술판은 내일의 일정을 위해 겨우 정리되었다. 두 시가 조금 넘어가자 얼큰하게 달아오른 취기와 피곤함으로 완전히 곯아떨어진 동료들의 코고는 소리가 방안을 조용히 울렸다. 몸은 피로했지만 어쩐지 잠을 이루지 못한 경진은 묘한 상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잠을 능히 이겨낼 만큼 달콤한 설렘이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억눌린 듯한 작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그는 그 속삭임이 자꾸 반복되자 눈을 떠 어두운 방안을 살폈다. 굳게 닫힌 다락으로 통하는 문 저편에서 나는 소리였다. 분명 항아와 설종이 자고 있을 터인데 무슨 일일까.
 ".....했어?"
 "그래.....는데,...........니까. 열어."
 안에서 철컥 소리를 내며 빗장을 푼 두 사람이 방으로 내려오자 경진은 지금 저 애들이 뭐하는 건가 새삼 궁금해졌다. 그래서 넌지시 두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두 사람은 엉금엉금 기어 하필 자신이 누운 곁에 오더니 서로 속삭이며 대화를 했다.
 "맨 끝에 진 샘, 그 옆에 진우랑 영식이, 그리고 동욱 샘과 게토레이."
 설종의 속삭임이 들리자 그는 조금 의아했다. 게토레이라니. 자신을 부르는 말인 것 같은데 어째서 그렇게 부르는 걸까.
 "누구부터 할래?"
 "저쪽 끝에서부터 하자. 진 샘부터 . 내가 진 샘하고, 반 네가 진우를 해."
 "알았어."
 다시 어둠 속에서 기어간 두 사람은 진 선생과 진우 곁으로 가 뭔가를 부스럭거렸다. 가늘게 실눈을 뜬 경진이 몰래 살펴보니 저희들끼리 소리 죽여 낮게 낄낄거리며 얼굴에 낙서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경진은 저도 모르게 씩 웃어버렸다. 낮에 물에 빠진 복수를 이렇게 하는가 싶어 어쩐지 귀여운 생각이 들었다.
 키득거리며 열심히 낙서를 그리던 설종은 자던 남자가 얼굴을 긁으며 몸을 뒤척이자 얼른 옆에 척 누웠다.



 "쉿!"
 건너편의 항아도 설종을 따라 구부정한 모습으로 엎드렸다가 남자들이 계속 자는 것을 확인하고는 부스스 일어나 둘이 같이 킥킥 웃어댔다. 그 모습을 보니 그도 따라 자꾸 웃음이 나려 해 입술을 깨물고 겨우 참았다.
 마침내 자신의 차례가 다가오자 경진은 어쩌나 고민을 했다. 눈을 뜨고 놀래 줄 건인지, 그냥 고스란히 당해 줄 것인지. 그와 동욱의 머리맡에 앉은 두 사람도 나름의 고민이 있는지 심각한 토론을 거치는 중이었다.
 "그나마 치프 샘이 말려서 그만둔 거잖아. 봐 주자."
 항아가 말했다. 역시 생각이 있는 녀석이었다. 그는 몰래 흐뭇해했다. 그럼 설종은 어떨까. 마구 기대가 되었다.
 "야, 내가 여태 게토레이한테 당한 게 있는데. 그냥 두면 섭하지."
 그 말에 경진은 울컥 화가 치솟으면서 무지하게 섭섭함을 느꼈다. 좋아한다더니, 이건 항아보다 못했다. 그러면서도 또다시 나온 게토레이란 말에 역시나 자신의 별명이 맞구나 여긴 경진이었다.
 "안 돼. 후환이 두려워. 4년차는 건드리지 말자."
 "알았다. 그럼 이제 옆방에 가자."
 "잠깐. 나 화장실 갔다 올게."
 항아가 엉금엉금 기어 화장실에 간 사이 설종은 경진의 옆에 쭈구리고 앉아 있었다. 달빛에 어른거리는 그의 얼굴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겁 많은 항아의 저지에 참기로 하긴 했지만 어쩐지 그냥 두기는 아쉬웠다. 그녀가 슬그머니 그에게 다가가 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경진이 안경을 벗은 얼굴은 처음이었다. 이참에 한번 똑바로 보고 싶었다.
 '콧대가 수월찮이 높당께.'
 잠든 그의 얼굴이 조각처럼 단정했다. 느긋이 다문 입술을 가만히 보자지 괜스레 탐이 났다. 설종의 손가락이 서서히 움직이더니 그의 콧등과 입술 근처를 배회했다. 그러다 다시 손가락을 오므리고 물러섰다.
 '나가 지금 미친 것이 아닌가 모르겠네.'
 이해할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의 입술을 만져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항아가 나오기 전에 얼른 끝내야 한다는 초조함에 마음이 급해졌다.
 '딱 한 번만, 한 번만 만져보자. 흐미, 떨리는 거.'
 달달 떨리는 손가락 끝으로 그의 입술까지 억지로 가져갔지만 쉽게 용기가 나질 않았다. 닿을 듯 말 듯 애를 태우던 그녀의 손가락이 살포시 경진의 입술에 내려앉았다. 먼저 검지가 닿고 , 다음 그 옆에 중지가 닿았다. 부드럽고 말랑한, 그리고 생각보다 뜨거운 입술이었다.
 한 번 만지니 욕심이 났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입술을 살그머니 쓸었다. 우뚝 솟은 콧날을 비단처럼 훑어 내려와 폭 가라앉은 인중을 지나 도톰하게 튀어나온 그의 윗입술에 이르렀다. 말랑한 입술 끝을 검지로 살짝 누르자 용수철처럼 탄력있게 튕겨 나왔다. 촉촉한 입술이었는데도 손가락 끝이 화상을 입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뱃속까지 뜨끈하게 익는 느낌이었다. 잠든 그의 숨결이 손가락 끝을 따스하게 휘감았다.
 그때 욕실에서 물 내리는 소리가 나자 설종은 퍼뜩 손을 치우고 몸을 뒤로 뺐다. 항아가 나오는 것을 보고 엉거주춤 일어난 설종은 그녀와 함께 문을 열고 옆방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사라진 뒤, 문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번쩍 눈을 뜬 경진은 문이 있는 쪽을 홱 노려보았다. 달밤이라 그의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들키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천둥소리보다 더 크게 쿵쾅대는 심장 소리를 그녀가 알아챌까 조마조마해 미칠 것 같았다.
 경진은 가만히 손가락을 들어 그녀가 쓸고 간 입술에 대었다. 그토록 떨리던 감촉이 마치 꿈처럼 아득했다. 얼굴이 간질간질하고 가슴이 화끈거리는 이 기분. 지독하게 달콤하고 온 몸이 그래도 붕 뜨는 듯한 착각을 주던 그 순간.
 경진은 불편한 몸을 돌려 옆으로 돌아누웠다. 이미 묵직하게 달아오른 몸을 가라앉히려면 오늘 밤을 꼬박 새워도 부족할 것 같았다. 그는 자꾸만 위로 늘어지는 입매를 억지로 다잡고 잠을 이루려 안간힘을 썼다. 그렇게 밤이 깊어갔다.

 아침이 되었을 때, 펜션 곳곳에서 난리가 났다. 남의 얼굴을 보고 웃다가 자기 얼굴에도 똑같이 뭔가가 그려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광분한 사내들이 즉각 범인 색출에 들어간 것이었다. 기나긴 30초간의 조사 끝에 결국 그들은 용의자를 찾아냈다.
 "반항아, 김설종! 죽을래?"
 3년차가 위협했지만 설종은 끄덕도 안했다. 오히려 새끼손가락으로 귀지를 파서 후 부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아, 누가 그러게 비인간적으로 물고문을 하래요? 그래도 샘은 예쁘게 됐네. 뺨에 큐피트 하트 문신."
 "어우, 진짜! 유성매직으로 그려서 지워지지도 않게 해 놓고."
 세수를 하고 나온 진우가 그녀를 죽일 듯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어찌나 문질렀는지 진우의 코끝이 빨갰다. 진우의 테마는 루돌프였다. 루돌프 검은 코. 여기저기서 장미꽃 테마와 조폭 칼자국 테마, 혹은 안경 테마들이 곳곳에서 나타나 송곳니를 드러내며 항아와 설종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자신의 미술적 재능을 살아 숨 쉬는 아름다운 캔버스에 맘껏 펼친 두 사람은 회심의 작품을 만날 때마다 좋아서 자지러지며 쌓였던 스트레스를 마구 풀었다. 그렇게 엎치락뒤치락 아침을 대충 챙겨 먹고 일행은 래프팅을 위해 동강으로 내려갔다.
 "아우, 경치 끝내 주네."
 "옥빛 물만 봐도 저절로 시원하다, 얘."
 동강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계곡 양쪽으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줄을 이었고 그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쉴 새 없이 불어오고 있었다. 래프팅 하는 곳에 이르자 여섯 명씩 두 개의 조로 나누고 인솔자의 설명을 들었다. 노처럼 생긴 패들을 쥐는 법과 물에 빠질 때 주의해야 할 점 등등을 듣고 구명조끼와 헬멧까지 착용했다.
 맨 앞에 경진과 진 선생이 자리를 잡고 중간에 설종과 진우가 탔다. 그리고 뒤에 3년차 선배 둘이 앉았다. 항아는 동욱과 함께 다른 조였다. 경진의 바로 뒤에 앉은 설종은 그의 넓은 어깨와 긴 등을 새삼스레 흐뭇한 시선으로 보았다.
 '등이 엄청 넓쩍하구마이라. 눕혀서 장기 둬도 쓰것네.'
 "자, 출발! 패들을 저으세요! 하나, 둘, 셋, 넷!"
 맨 뒤에 앉은 인솔자가 이끄는 대로 구령을 세게 외쳐가며 강을 따라 내려갔다. 바위에 부딪혀 하얗게 부서지는 거품과 얼굴을 차갑게 식히는 물보라에 더위가 확 식었다. 점점 속도를 빠르게 하여 노를 젓다 급격한 커프길에 들어서자 그만 배가 뒤집히고 말았다.
 "아악!"
 옆자리의 진우와 마구 엉키며 물속에 빠진 설종은 발이 땅에 닿지 않자 겁이 더럭 났다.
 "어떡해, 나 수영 못 하는데."
 구명조끼가 있어서 다행히 뜨긴 하지만 자세가 불안했다. 그녀가 물살에 휩쓸러 가지 않게 노력하며 겨우 바위를 잡고 지탱할 동안 키큰 남자들은 뒤집힌 배를 똑바로 띄웠다.
 "잡아."
 먼저 배에 탄 경진이 선뜻 손을 내밀자 설종이 그의 팔을 잡았다. 설종의 손목을 꽉 움켜쥔 그는 단숨에 그녀를 끌어올렸다. 군살이 하나도 없는 팔이었지만 완력이 대단한 그에게 설종은 속으로 살짝 감탄했다.
 '힘은 쓸 만허구만. 그래도 속단을 하면 안 돼재. 팔뚝 힘과 정력은 상관 없는 것이재. 어디 그짓을 할로 하간디?'
 팔뚝 한번 잡은 것으로 한 남자의 정력까지 속속들이 가늠해 보는 설종의 속마음을 알았다면 아마도 경진은 그녀를 다시 물속으로 밀어 빠뜨려 버렸을 것이다. 그렇게 한 시간 여 래프팅으로 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면서 몇 번이나 일행은 물에 빠졌고 그럴 때마다 경진은 알게 모르게 그녀를 챙겼다.
 '요즘은 너무 잘 해줘서 마음이 안 놓여. 사람이 확 달라져버렸당께.'
 그가 뒤에서 힘껏 밀어주어서 배에 쉽게 올라탄 설종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래프팅이 무사히 끝나자, 인솔자가 패들과 구명조끼, 헬멧을 반납하라고 지시했다. 설종이 구명조끼를 벗었을 때, 경진은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돌리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설종은 베이지색 나시를 입고 있었는데, 물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일단 푹 젖고 나자 옷이 가슴에 온통 달라붙어 상당히 노골적으로 몸의 윤곽이 드러나고 있었다. 얇은 브라를 했는데도 중간에 도톰한 유두까지 비쳐 더할 수 없이 고혹적인 느낌을 주었다. 경진의 얼굴이 확 달아오르며 민망함에 저도 모르게 몸을 돌려버렸다.
 그가 눈치를 살피니 남자들은 말은 하지 않아도 흘끔흘끔 그녀를 훔쳐보고 있었고 설종은 그런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여자는 그녀 하나뿐이었기에 더욱 시선이 갔다. 경진은 미칠 것 같았다. 갑자기 참을 수 없는 화가 솟아올라 억제하기가 힘들었다. 쳐다보는 녀석들의 눈두덩을 모조리 날려버리고 싶었다. 그가 어금니를 꽉 깨물며 화를 누루고 있는데, 그제야 자신의 옷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챈 설종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세상에, 이게 웬 날벼락이야!'
 생각지도 못했건만, 일이 이 지경이 되자 설종은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다. 어제 옷을 다 버려 갈아입을 옷을 가져 오지 못했기에 더욱 난감했다. 설종이 어깨를 구부정하게 구부리며 의식적으로 옷을 앞으로 쭉 늘여 당기고는 엉거주춤 물 밖으로 걸어가는데, 뒤에서 경진이 화난 듯 그녀를 불렀다.
 "김설종."
 그녀가 몸을 돌리니 경진이 미리 챙겨 왔던 제 새 옷을 내밀었다. 그것이 경진이 갈아입을 옷이란 걸 깨달은 설종은 미안함에 덥석 받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자 그의 이마가 더욱 찌푸려졌다.
 "빨리 입어."
 그가 무섭게 노려보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옷을 받아 재빨리 젖은 옷 위로 덮어 입었다. 몸은 계속 축축했지만 노골적인 몸의 곡선을 가리고 나니 그나마 훨씬 나았다. 그러나 갈아입을 옷을 줘버려 젖은 옷을 계속 입고 있어야 할 그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그런데 경진이 자신이 입고 있던 젖은 티셔츠를 머리 위로 올려 벗었다. 갑자기 드러난 그의 맨가슴에 설종의 휘둥그레진 눈이 그대로 꽂혔다.
 '허걱! 저 , 저 가슴 좀 봐!'
 한 번도 본 적 없어서 상상도 못했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하 그의 상체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많이 말랐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판판하고 둥그스름한 가슴 근육과 그 아래 군살 하나 없는 복부의 중앙은 일자로 움푹 들어가 있었다.
 '저것이 말로만 듣던 1등급 육질이지라. 속살이 야들야들할 것이구먼.'
 아름다운 인간의 육체에 대한 순수한 감동으로 설종은 침을 후루룩 들이켜며 정신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경진은 젖은 옷을 척척 접어 빨래처럼 돌돌 말아 꾹 짜서는 최대한 물기를 빼고 다시 입으려 옷을 툭툭 털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와 자신의 시선이 마주치자 설종은 여태 한나도 안 본 척 얼른 눈을 피하고 말았다.
 '흐미, 넋 빠진 년. 뭣을 그리 본다냐.'
 설종은 화끈 달아오른 얼굴을 애써 감추며 태연하려 애썼다. 왠지 뒤통수가 따끔한 것이, 그가 자신을 보고 있을 것만 같아 그쪽은 아예 쳐다보지도 못했다. 래프팅을 마친 항아네 조를 만나 함께 작은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갈 때, 설종의 옆자리에는 동기 진우가 앉았다.
 "어우, 야. 나도 갈아입을 옷 안 가져와서 좀 벗어 짜야겠다. 축축해 미치겠어."
 그러면서 진우도 티셔츠를 홀라당 벗었다. 아무리 친한 동기라도 맨가슴을 드러낸 남자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 가는 것은 조금 거리낌이 있어, 설종은 일부러 고개를 반대로 돌리고 자는 척했다. 그런데 눈치 없는 진우가 계속 말을 걸어왔다.
 "너, 치프 샘 못 봤지. 이야, 몰랐는데 운동 깨나 한 모양이더라, 장난 아니던데?"
 "몰라. 운동을 했는지 말았는지."
 설종이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진우가 흥분하기 시작했다.
 "얘가 뭘 모르네. 운동 안 하고 저절로 그렇게 되는 줄 아냐? 나도 운동이나 좀 할까?"
 "그냥 생긴 대로 살아. 그리고 1년차가 운동할 시간이 어디 있냐?"
 "그래? 야, 쫑! 너도 이 오빠 몸이 이만하면 쓸 만하다고 생각하냐? 응? 객관적으로 좀 평가해 봐라."
 그 말에 고개를 돌린 그녀가 진우의 몸 상태를 눈으로 쓱 훑었다. 그리고 가차 없이 판단을 내렸다.
 "쟈가장 쟝쟝 쟝쟝쟝!"
 "뭐?"
 "네 갈비뼈로 기타 치는 소리다."
 "이, 씨!"
 진우가 입을 다물고 확 노려보았지만 설종은 태연히 눈을 감았다. 다비드의 조각처럼 완벽한 육질을 대하고서 한껏 수준이 높아진 그녀의 눈은 허접한 갈비뼈 따위를 취급하기를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난 뒤 다들 노래방에 가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저녁 때 곁들인 반주로 다들 얼큰하게 취한 터라 노래방에 들어서자마자 분위기가 달아올라 순식간에 광란의 도가니로 변하고 말았다.
 "사랑하고 사랑하는 하나뿐인 내사람아!"
 립스틱을 진하게 칠하고 가발까지 쓴 영식이 진우와 얼싸 안으며 너훈아의 내 사람을 열창했다. 여자 역을 자처한 영식의 애절한 눈빛과 진우의 과감한 애정표현이 의국원들의 심금을 울렸다.
 "쟤네들 사실혼 관계라며?"
  동욱이 장난스레 묻자 그 말이 너무 웃겼던 설종이 배를 잡고 쓰러졌다. 웬만한 동거녀보다 더 다정해 보이는 진우와 영식이니 그런 소릴 들을 만도 했다. 설종은 한참 웃다 문득 얼굴에 와 닿는 눈길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들의 맞은편에 경진이 앉아있었는데, 그는 순간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피해 버렸다. 그 모습에 설종의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쫑, 너두 한 곡 불러!"
 옆 자리의 항아가 떠밀어주자 설종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애창곡 밤이면 밤마다를 불렀다. 댄스를 곁들인 파워풀한 가창력으로 그녀가 노래를 부르자 방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후끈 달아올랐다. 마지막은 마이크를 천장까지 던졌다 받는 것으로 마무리하자 다들 휙휙 휘파람을 불며 박수를 쳐댔다.
 제 노래를 마친 설종이 자리에 앉아 다음은 동욱이었다. 그가 부드러운 중저음의 미성으로 김동률의 기억의 습작을 부르자 설종은 음악에 맞추어 몸을 흔들고 고개를 끄덕여가며 작게 따라 불렀다. 기본적인 목소리가 좋은데다 정확한 음정으로 짚어주니 듣기 좋을 수밖에 없었다. 옆자리의 항아와 감탄스런 눈빛을 나누며 설종은 흥겨움에 들떴다.
 그가 자리로 돌아오고, 화면에 다음곡이 떴는데 부를 사람이 일어나지 않자, 다들 누가 선곡을 했나 싶어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구석진 곳에 앉아있던 경진이 앞으로 슥 나왔다.
 "와우, 경진이 노래 부를 거야?"
 "박 치프, 대체 이게 웬일이야? 이야, 살다보니 이런 날이 다 오고. 야! 다들 조용히 앉아. 우리 경진이 노래 좀 듣게."
 4년차들이 기대에 넘치는 눈으로 몸을 세우자 설종은 옆자리 동욱에게 살짝 물었다.
 "4년차 샘들, 왜 저리 흥분해요? 치프 샘 노래 잘하세요?"
 "들어 봐."
 그 한 마디뿐이었다. 설종은 잔뜩 궁금한 얼굴로 앞에 선 경진을 바라보았다. 키가 훤칠하니 큰 그가 앞에 서니 모니터 가까이 앉은 그녀의 목이 저절로 꺾였다. 그가 선택한 노래는 송창식의 '푸르른 날'이었다. 설종이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노래인데, 그가 어떻게 부를지 솔직히 무척이나 기대가 되었다.
 마이크를 잡은 경진의 얼굴은 취기로 약간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평소의 칼날 같은 긴장감이 조금은 사라진 얼굴이라 표정이 훨씬 풍부하고 느긋해 보여 어쩐지 보기가 좋았다. 늘 저런 얼굴이라면 좋을 텐데, 하는 엉뚱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전주가 나오자 마이크를 입 가까이 가져온 그가 눈을 지그시 감고 첫 소절을 불렀다.
 순간,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쏟아져 들어오는 착각이 들었다. 성량이 굉장히 풍부하면서도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낮고도 감미로운 경진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자 가슴이 미칠 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귀밑에 찌르르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감동한 설종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한다.'는 가사가 든 바로 그 소절을 부르는 순간, 천천히 떠진 그의 눈동자가 그녀에게 머물렀다는 건 설종만의 착각일까? 희미한 조명을 받아 경진의 이목구비가 음영이 뚜렷하게 살아났다. 설종은 그에게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에게서 저절로 풍겨 나오는 숨 막힐 듯 아름다운 남자의 향기가 그녀의 가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의 노래가 클라이맥스에 이르자 그녀는 자신이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슴 속으로 파고드는 것처럼 호소력 있는 목소리에 감성이 마구 자극된 것이었다. 그가 노래를 마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와우,샘! 정말 잘 부르십니다."
 "하얀 그 탑의 김영민보다 백배는 낫습니다."
 경진은 쑥스러운 듯 마이크를 내밀었다. 다음 차례인 항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마이크를 받았는데, 이상하게도 경진은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가까운 항아의 자리, 즉 설종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뜻밖에 그가 옆자리에 앉자 설종의 가슴이 더욱 두근거렸다. 노래에 대한 감동도 아직 가시지 않았는데, 바로 옆에서 그의 체온과 향기를 느끼자 입술 끝이 찌릿 거렸다. 그녀의 시선은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항아에게 향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온통 경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다리를 바꾸며 몸을 고쳐 앉던 그가 자기 허벅지에 있던 손을 옆으로 내리면서 그녀의 손을 턱 덮었다. 자신의 손 위에 뭔가 두툼한 것이 얹혔고, 그것이 경진의 손이란 사실을 깨닫자 설종의 머리가 완전히 텅 비어 버렸다.
 '시방, 이것이 무엇이냐. 게토레이의 손이란 말이더냐.'
 그녀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커다랗고 길쭉한 경진의 손이 조그만 설종의 손을 완전히 덮고 있었다. 설종은 항아의 얼굴만 뚫어지게 보면서,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게 온 신경을 거기에 쓰고 있었다. 그런데 경진 역시 손을 얹은 채 전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기만 해, 설종은 혹시 그가 제 손 밑에 깔린 것이 그녀의 손이란 걸 모르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하게 되었다.
 '모르는 거여. 내 손이 아니라 그냥 다른 물건이라 생각하는 게 틀림없스야.'
 설종은 고민을 거듭하다 천천히 손을 움직여 그의 손아래에서 슬슬 빼내기 시작했다. 조금씩 그녀의 손이 옆으로 빠져나왔지만 경진은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자꾸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제는 손바닥아 나오고 마지막 새끼손가락 마디까지 거의 다 빠져나왔다 싶을 무렵, 경진의 손이 갑자기 그녀의 손을 확 낚아챘다.
 '헉!'
 설종의 심장이 쾅 뛰면서 거칠게 피를 뿜어냈다. 그의 손이 강한 힘으로 설종의 손목을 움켜쥐더니 자기쪽으로 끌어당겼다. 설종의 심장이 억제하지 못할 만큼 빠르게 쿵쿵 뛰고 있었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두 사람은 언뜻 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항아가 노래하는 모습을 계속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 속은 치열한 전쟁중이었다.
 제 쪽으로 설종의 손을 당긴 경진은 다시 의자에 그녀의 손을 깔고 제 손으로 부드럽게 덮었다. 그의 손이 워낙 커서 그녀의 손은 손톱 끝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설종이 망설이고 있는데, 경진의 손가락이 그녀의 손을 힘주어 감싸더니 그의 엄지가 천천히 움직이며 그녀의 살결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설종의 눈동자와 입이 동시에 벌어졌다.
 '미, 미, 미친놈! 이거 서, 성희롱 아냐?'
 술 취한 상사가 노래방에서 옆자리에 앉아 손을 쪼물딱거렸다는 사실은 명백한 성희롱이었다. 거기에 생각이 이르자, 설종은 벌떡 일어나 그의 뺨을 철썩 소리가 나도록 세겨 후려 갈기.........는 상상을 하다 말았다. 그러기엔 그 감각이 솔직히 싫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싫지는 ........않다. 오히려.........괜찮네. 솔직히 말해서, 흐미 좋다. 참말로 기분 좋다. 가슴이 마구 떨리고 다리 사이가 꽉꽉 조여 오는 것이 진짜 끝내주누마. 손 하나만 잡았는디 이로코롬 좋단 말이시?.......근디 나가 시방 즐기고 있는 것이여? 그런 것이여? 말짱한 처녀가, 딴 놈도 아니고 게토레이에게 손모가지를 잽히고도 좋아서 입이 벌어지는 것이여? 말하자면 이건은 강간이 아니고 화간 인것이여? 이런 음탕한 것!'
 설종이 끝 같데 없는 자신만의 4차원 세계에 완전히 빠져 헤매는 동안, 경진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맘껏 그녀의 손을 만지고 있었다. 세게 쥐면 부러질 듯한 그녀의 손목이었다. 가녀리고 나긋한 그녀의 손은 아기처럼 작고 보드라웠다. 처음 그녀의 손을 덮은 것은 우연이었지만, 설종과 살이 닿은 순간 그는 자신이 여태 그것을 너무나 원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조금씩 손을 빼낼 때, 어찌 해야 하나 망설이며 가만히 있었으나 완전히 그녀의 체온이 빠져나간 순간 본능적으로 손이 움직였다. 그녀의 손을 가득 쥐었을 때, 그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단 하나였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노래방에서 숙소로 돌아오며 항아와 설종은 동욱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사람은 경진의 노래가 선사한 감동에서 아직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였다.
 "진짜 놀랐어요. 치프 샘이 그렇게 노래를 잘할 줄은."
 "그러게요, 그렇게 잘 부르면서 왜 그동안 회식 때는 한 번도 안 불렀대요?"
 그러자 동욱이 피식 웃었다.
 "생각보다 굉장히 쑥스러움 타는 성격이거든."
 "그래도 그렇지. 너무 아까워요. 가수해도 되겠던데. 3년차 샘들도 깜짝 놀라는 거 봐서 그동안 의국에서 노래 부르신 지 꽤 오래 되었나 봐요?"
 항아의 질문에 동욱이 머리를 들고 아련한 눈으로 희미하게 웃었다.
 "그 녀석이랑 내가 1년차일 때, 그때만 불렀지. 안 부르면 선배들이 갈구니까."
 의국에서 막내인 1년차는 하늘같은 3,4년차 앞에서 어떻게든 재롱을 피워야 했다. 노래방에서 처참하게 망가지며, 사회생활이 이렇게 더러운 거냐, 이렇게까지 해서 의사 생활을 이어가야 하나 회의를 가지던 1년차들은 시간이 흘러 3,4년차가 되면 그 시절을 개구리처럼 까맣게 잊어버렸다.
 "신기하게도, 그때는 시키는 선배들이 진짜 짜증나고 미웠는데, 지금 너희들 노는 거 보니까 왜 그렇게 귀엽냐?"
 동욱이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리자 항아와 설종은 그를 밉지 않게 쏘아보았다.
 "어우, 뭐예요! 짜증나!"
 "근데, 샘. 1년차 입국식 때 무슨 노래 불렀는데요?"
 설종의 물음에 동욱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때를 회상했다.
 "이효리의 텐 미닛!"
 "네에? 푸하하하!"
 "참고로 경진이가 효리고 나머진 백댄서였다. 안무 연습에 며칠을 매달렸지. 그때는 치프부터 층층시하 진짜 지독했거든. 제대로 안 하면 다 죽일 분위기였어."
 항아와 설종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러면서도 설종은 한편으로 너무 너무 궁금했다. 그가 텐 미닛을 부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돈을 몇 백을 줘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그날 밤, 다락방에 누은 설종은 오지 않는 잠을 부여잡고 이리저리 뒤척이고 있었다. 아까 노래방에서 경진이 손을 잡았던 일을 백번도 더 되새겨 보는 중이었다.
 '진짜 손이 컸어. .........그런데 너무 너무 부드러웠어. 그 손가락.'
 그녀의 손등 위에서 애를 태우며 움직이던 기다란 손가락의 감촉을 생각하자 얼굴이 뜨끈히 달아올랐다. 설종은 그런 자신이 못마땅해 이불을 들어 얼굴에 푹 덮어썼다. 잠시 그 속에 파묻혔던 그녀가 아래로 손을 확 내려 이불을 젖히며 어둠 속에서 눈을 부릅떴다.
 '게토레이가 나를 좋아하는 것이 분명하당께!'
 여태까지는 항아가 아무리 말해도 완전히 믿을수 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 외에는 그의 행동을 설명할 만한 타당한 이유가 없었다. 백 번 양보해서 래프팅 때 물에 빠졌던 자신을 건져 준거나 옷을 벗어준 일들은 치프로서 여자 후배에게 세심하게 배려한 것이라 여긴다고 쳐도, 노래방에서 남몰래 손을 잡고 어루만지는 것은 엄연히 그런 한계를 벗어난 행동이었다. 여태 공부에 치여서 연애감정에 서투른 설종도 그런 것쯤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확실해. 이제야 알겠어.'
 더듬더듬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듯 온갖 종류의 삽질을 일삼았던 설종은 마침내 정확한 진실을 깨닫게 되자 눈앞이 확 밝아지는 기분이었다. 더불어 시작되는 궁금증.
 '언제부터야? 언제부터 날 그렇게 좋아했던 거지?'
 가늠하긴 어렵지만 그렇게 오래된 것 같지는 않았다. 길어야 한두 달이 아닐까.
 '아, 짜식이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이놈의 인기는 진짜 끝이 없다니까!'
 봐주는 사람 하나 없는데 설종은 미친년처럼 어깨를 들썩이며 거드름을 피웠다. 그런데 마구 솟구치는 의아함.
 '근데 혹시 그 인간 사디스트 아냐? 좋아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사람을 갈구지?'
 생각해 보면 늘 치프는 그녀에게 혹독했다. 사실 설종이 그렇게 실력이 모자라는 의사는 아니었는데, 경진이 늘 무섭게 야단치니까 스스로 자신감이 떨어지며 자기가 바보가 아닌가, 의심하는 중이었다. 그러다 설종은 혹시 박경진이란 남자는 좋아하는 여자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아야 흥분하는 변태가 아닌가 왈칵 걱정이 되었다.
 '아씨, 진짜로 변태면 그럼 난 완전 신세 조지는 거잖아.'
 좋아하면 할수록 괴롭히는 남자라니, 이건 뭐 스토커도 아니니까 신고도 못하고 골병은 골병대로 드는 아주 까다로운 상대였다. 어쨌든 그의 마음을 알았으니 이제 그녀의 대응이 필요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 그러나 설종은 어둠 속에서 야비한 미소를 지었다.
 '새꺄! 네놈이 껄떡댄다고 내가 받아 줄 것 같으냐? 어림도 없다, 홧홧홧!'
 설종은 몸을 비틀어 돌아누우며 소리죽여 웃었다. 여태 자신이 게토레이에게 당한 것이 얼만데, 그런 성격 이상한 놈이 좋다고 덤빈다고 얼씨구나 옷고름을 풀 수는 없었다. 아무렴, 절대 그럴 순 없었다. 그녀에게도 자존심이란 게 있는데 말이었다.
 '애를 바짝, 바짝 태운 다음에 나중에 슬프게 돌아서며 말해줘야지. 미안해요오, 우린 인연이 아닌가보요오! 음후후후훗!'
 그때 게토레이의 일그러진 표정으로 무릎을 꿇으며 그녀를 괴롭혔던 걸 죽도록 후회할 것을 생각하니 통쾌함에 온몸이 떨리며 저절로 입이 벌어져 참을 수가 없었다. 설종이 부스럭거리며 연방 잠자리에서 이리저리 뒤척이자 옆 자리에 누운 항아가 작게 헛기침을 했다.
 "쫑아, 잠이 안 오니?"
 "어, 반. 안 잤어?"
 둘 다 자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알자 마음이 통한 두 사람은 아래층에 들릴까 소리를 한껏 낮춰 속삭이기 시작했다.
 "나 오늘 되게 놀랐어. 치프 샘 진짜 노래 잘하더라. 안 그래, 쫑?"
 "그러게. 노래를 잘하니까 카수! 앞으로 그 인간을 박카수 B라 불러주자."
 설종을 은근히 살피던 항아가 마른 침을 삼키더니 조심스레 말문을 뗐다.
 "근데 있잖아. 쫑아, 너 동욱 샘 어떻게 생각해?"
 "뭐?"
 "내가 보기엔 그 샘이 너한테 관심 있는 거 같던데. 못 느꼈니?"
 항아의 말에 어둠 속에서 설종의 눈동자가 데구르르 굴렀다.
 "그냥 되게 편한 선밴데. 같이 얘기하면 재미있고. 그뿐이야. 그 샘도 그런 눈치 전혀 없던데?"
 "그래.....?"
 뭔가 미적지근한 기분으로 항아가 한숨을 쉬었다. 눈치라곤 밥비벼 먹으려도 없는 설종이라 저렇게 말해도 믿을 수가 있어야지, 그녀는 답답하기만 했다. 언제부턴가 동욱 샘이 자꾸만 눈에 밟히는 그녀의 속병을 누가 알아주랴.
 반항아는 키 크고 몸매 좋고 똑똑하고 성격까지 좋은, 어떻게 보면 완벽한 여자였지만, 그 속을 파헤쳐보면 어딘가 불안정한 면이 있었다. 대학 1학년 때, 그녀가 무척 좋아한 선배가 있었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그를 사랑했던 항아는, 선배와 사귀게 되자 세상을 얻은 듯 기뻐했다. 그를 정말로 사랑했기에 몸과 마음의 순결도 아낌없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그에게 그녀는 그저 훈장처럼, 같이 자봤다고 친구들에게 자랑 할 수 있는 꺼리에 불과했다. 자신과의 성관계에 대해 떠벌리고 다녔던 선배 때문에 그 이야기가 돌고 돌아 마침내 그녀에게 돌아오자 항아는 너무나 큰 충격과 상처를 받았다. 그리고는 심한 남성 불신증을 가지게 되었다. 설종과 자영이 아무리 도와주려 노력해도 한 번 닫힌 그녀의 마음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예쁜 외모와 지성 탓에 그녀의 주변에는 항상 많은 남자들이 끓었으나, 그런 남자들과 의미 없는 만남을 계속 할수록 남자들의 이중성에 대해 더욱 깊이 알게 되었다.
 "남자들, 여자를 보면 하는 생각이 뭔지 알아? 무조건 저 여자랑 해 보면 어떨까 하는 것뿐이야. 예외라곤 한 놈도 없어. 그중에도 제일 웃긴 건 별별 지랄 다하고 돌아다니다가 장가갈 땐 처녀 찾는 놈들이야, 가끔은 그런 쓰레기들을 싹 죽여 버리고 싶어."
 성에 대해 솔직하고 적극적인 그녀가, 보수적이고 이중적 잣대를 가진 한국 사회에서 어쩌면 영영 행복해지지 못 할지도 모른다는 자괴감이 들 즈음, 항아는 자신이 동욱이란 남자에게 문득 끌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딘가 한 발짝 세상에서 물러서 관조하는 듯한 동욱의 독특한 분위기와 이따금 던지는 촌철살인의 한 마디가 그녀의 시선을 확 사로잡았다.장난기가 다분한 사람이지만 진지해야 할 때는 더없이 진지했다. 가끔 씨익 웃는 모습에 가슴이 철렁할 때도 있었다. 치프 경진이나 병원의 몇몇 괜찮은 레지던트를 보면 간혹 눈길이 가며 섹시하다 느끼긴 했지만 동욱처럼, 그 사람 마음에 들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너무나 오랜만이었다. 첫사랑의 그 개자식 이후로 처음이라 무를 만큼.
 그런데 하필 같은 의국원인데다 동욱은 설종에게 마음이 있어 보였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설종과 자영과는 평생 함께 가고 싶었기에 항아는 자신의 남자관계로 우정에 지저분한 얼룩이 지도록 하고 싶지 않았다. 한마디로 쉽게 건드리기 힘든 남자였다. 항아는 낮게 한숨을 쉬고는 잠을 청하려 눈을 감았다. 내일은 돌아가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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