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September 25, 2019

그녀의 정신시계 #4 (골 때리게 사랑스런 그대.)

아침 컨퍼런스 시간.
 어젯밤 늦게까지 심전도 리포트를 위해 책을 읽은 데다 새벽부터 일어나 자체 회진을 하러 병실을 돌아다니다 보니 설종은 쏟아지는 잠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앞에서 발표하는 영식의 얼굴을 죽일듯 노려보아도 자꾸 내려오는 눈꺼풀을 들어올리기엔 역부족이었다.
 "본태성 고혈압의 경우는 그 치료법이..........."
 영식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모차르트의 자장가보다 더 감미롭게 들렸다. 설종은 졸지 않으려 볼펜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쿡 쑤셨다. 잠시 정신이 든다 싶었는데 순간 몸이 아래로 휘청거렸다. 하마터면 책상에 머리를 박을 뻔했다.
 '아 씨, 또 졸았네.'
 설종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비비며 정신을 차리는데, 옆에 앉은 항아가 땅에 떨어진 펜을 줍는 척 하며 그녀에게 속삭였다.
 "치프 눈치 장난 아니다. 눈 좀 떠."
 그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설종이 눈을 크게 뜨고 치프가 앉은 곳을 흘끔거렸다. 입술까지 앙 깨물고 자신을 노려보는 경진을 본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더니 정말로 잠이 싹 달아나 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허리르 펴는데 갑자기 성이 확 났다.
 '저 인간은 앞에서 발표하는 영식이 얼굴 안 보고 내 얼굴을 보고 지랄이야, 지랄이!'
 그렇게 욕을 하면서 잠을 쫓은 설종은 컨퍼런스가 끝나자 최대한 조심해 일부러 치프가 없는 쪽으로 걸어가며 안 붙잡히고 강의실을 벗어나려 머리를 굴렸다. 잡히면 또 한 소리 들을 것이 뻔했다. 다행히 제일 먼저 강의실 문을 열고나오니 다들 그녀를 따라 우르르 밖으로 나왔다.
 뒤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시선에 뒤통수가 따가웠지만 설종은 두 눈 딱 감고 모른 척 발걸음을 재빨리 옮겼다. 그런데 그녀가 내과 병동에 거의 도착했을 때, 갑자기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 세 명이 그녀의 앞을 척 막아섰다. 놀란 그녀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김설종 선생님 되십니까?"
 "네? 네. 그런.....데요."
 "여기."



 그들이 내민 것은 엄청나게 큰 꽃다발이었다. 설종은 황당한 표정으로 커다랗게 뜬 눈동자만 깜빡였다.뒤에서 그 상황을 지켜보는 내과 의국원들도 낮게 술러이며 궁금해 하고 있었다.
 "이, 이게 뭐예요?"
 "생명의 은인이신 김설종 선생님께 저희 형님께서 보내시는 핏빛처럼 붉은 장미입니다. 받아 주십시오."
 "받아 주십시오."
 뒤에 있던 두 남자가 머리를 확 숙이며 그 말을 복창했다. 몇 백송이는 되어 보이는 장미 꽃다발이 눈앞에서 어른거리자 설종은 할 말을 잊었다. 그러나 일단 그녀는 복도 한쪽으로 빠졌다. 뒤에서 오시는 교수님들의 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비켜나자 다들 한 번씩 설종을 흘끔거리며 지나갔다. 아침부터 이게 웬 망신인지.
 "저기, 형님이라니오?"
 "응급실에서 저희 형님을 살려 주신 것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왜, 팔에 칼 맞아서 오신........."
 설종의 두 눈이 깜빡깜빡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응급실에서 치토스가 조폭에게 슈처를 해 주었던 게 기억이 났다.
 "전 한 일이 아무것도 없는데. 아무튼 저는 지금 굉장히 바쁘거든요? 일단 스테이션에 맡겨 주실래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나중에라도 저희 형님 병실에 꼭 들러 주십시오."
 그렇게 맡기고 간 꽃다발은 회진을 마치고서 설종에게 다시 안겨졌다. 꽃다발 옆에 달린 편지봉투을 설종이 집어 들자, 옆에 있던 진우, 영식, 항아는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꼭 그 내용을 알고야 말겠다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다.
 "읽어봐. 빨리."
 그러나 편지를 눈으로 훑어 내리던 설종은 반도 못 읽고 덮어 버리고 말았다.
 "됐어. 버려."
 그러나 그녀의 손 안에서 구겨지는 편지를 그냥 두고 볼 세 사람이 아니었다.
 "좀 보자니까, 어서 이리 내! 야, 뺏어!"
 "왜 이래! 안 돼애!"
 설종이 몸부림쳤지만 세 사람은 협공으로 기어이 그 편지를 빼앗았다. 설종을 피해 병동 구석으로 멀리 뛰어간 진우가 종이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야, 빨리 안 가져와?"
 편지에 쓰인 글귀를 읽던 진우가 갑자기 그 자리에 푹 쓰러지더니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웃기 시작했다.
 "우하하하! 우하하하하하! 큭큭큭! 어허, 어헉! 수, 숨을 쉴 수가..........."
 "왜, 왜?"
 "내가 먼저야! 대체 뭐라고 썼기에......"
 "이것들이, 죽을래?"
 그렇게 편지를 돌려본 항아와 영식은 진우와 똑같이 기절하며 쓰러졌고, 동기들은 그날 내내 설종과 부딪힐 때마다 그녀를 놀렸다.
 "설종씨를 처음 본 순간 뒤통수에 망치로 퍽치기 당한 아찔함을 느꼈습니다!"
 "야!"
 "삭카린을 국자로 떠먹어도 그대의 목소리보다 달콤하겠습니까?"
 "이것들이 진짜!"
 "불타는 이 마음을 접수해 주신다면 그 기쁨에 제 붉은 창자를 끄집어내 줄넘기라도 펄쩍펄쩍 뛰겠습니다."
 "죽는다, 그만 해라잉?"
 설종이 이를 드러내며 위협했지만 먹힐 리가 없었다. 항아와 진우는 완전히 신이 났다.
 "아구창을 갈겨서 이빨이 싸그리 아작이 나더라도 그대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졸라게 귀여운 나의 설종 씨!"
 "캬아! 문장력이 장난 아니다. 절절한 마음이 전해진다. 안 그러냐?"
 "골 때리게 사랑스런 그대여는 어떻고! 주옥같은 문장이다. 정말."
 "어우,씨!"
 결국 설종은 세 사람을 피해 당직실을 나가고 말았다. 요즘 되는 일도 하나도 없는데 별 희한한 것들이 그녀에게 태클을 걸어왔다. 사는게  너무 힘든 그녀였다.

 여느 날보다 환자가 적어 조금 한가한 오후. 설종과 항아는 자영이 근무하는 내과 워드에 앉아서 커피를 얻어 마시며 심각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오늘의 주제는 '이 병원에서 어떤 넘이 가장 섹시한가' 였다.
 "당연히 정형외과 치프 장인하 샘이재. 얼굴이랑 몸 봤나? 완전 직이준다. 장난 아이거든?"
 자영이 엄지를 세우며 단언하듯 말했다. 그의 외모가 완벽하단 사실에는 항아와 설종도 이견이 없었다.
 "잘생기긴 했지. 근데 침대에선 어떨까? 의외로 그런 타입이 정력이 약할 수도 있다더라."
 장인하가 들었으면 거품을 물고 덤빌 소리였지만 없는 데서는 나라님도 욕한다고 했다.
 "에이, 정형외과가 얼마나 힘이 좋은데. 그것보다는 마취과 환화림 선생이 장 치프랑 사귄다던데?"
 "한 선생이 혼자 좋아하는 거야. 장 치프는 여자한테 관심 없어. 그것만 봐도 하체가 부실한 게 틀림없어. 패스!"
 "카면 반, 니는 누가 최고로 섹시하단 말인데?"
 "음........우리 치프 샘 목소리가 끝내주지. 그런 목소리로 내 이름 불러주면 순식간에 아래가 젖어버릴거야."
 "게토레이? 시방 야가 환장을 했나.개또라이랑 뭔 짓을 하겠다고."
 "놔 도라. 저 가스나 저거는 목소리 섹시한 남자한테 젖어든다 아이가."
 "허따, 그래서 반, 너는 게토레이하고 거시기를 헐 수 있을 것 같냐?"
 "못 할 것도 없지?"
 "이런 미친!"
 설종이 질렸단 표정으로 몸을 뒤로 젖혔다. 다른 놈도 아니고 박경진과 그럴 생각을 하다니, 진정한 시대의 반항아였다. 그때 스테이션의 내선 전화가 크게 울리자 자영이 몸을 돌려 얼른 수화기를 들었다.
 "네, 901워드 차지 문자영입니다..........네"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말에 귀를 기울이던 자영이 눈을 돌려 설종을 흘끔 보았다. 그 시선에 긴장한 설종이 눈을 크게 뜨며 엉덩이를 슬그머니 들었다.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자영이 몸을 세우더니 설종을 보고 혀를 쯧쯧 찼다.
 "니 죽었다."
  설종이 울먹였다."
 "또 왜에?"
 "내과 치픈데 니 당장 의국에 오란다. 엄청 화난 목소린데?"
 "의, 의국?"
 다른 곳도 아니고 의국이란 말에 설종이 몸서리를 쳤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마주 쥐어 가슴에 대고 발을 동동 구르며 항아를 보았다.
 "왜 , 왜 부르는 걸까?"
 "모르지. 뛰어 가면서 잘 생각해 봐."
 "어허헝! 내 팔자야!"
 설종이 엘리베이터로 사라지자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항아가 의구심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치프가 유난히 쫑을 갈구네?"
 "그래 말이라. 아를 완전 쥐 잡듯이 잡네. 사실 쫑이보다 훨씬 못하는 것들도 쌨는데."
 그 말에 어딘가 불편한 표정으로 항아가 자영을 보았다.
 "그거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야?"
 "그런 뜻은 아인데, 찔리면 뭐 할 수 없고."
 태연하게 자영이 받아치자 항아가 눈을 하얗게 뜨고 그녀를 째려보았다.

 헐레벌떡 의국으로 뛰어가던 설종은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아가며 체크를 했다.
 "차트.....좀 밀렸고, 검사지.....정리했고, 헉헉! 스케줄 표도 했고. 뭐지? 차트 때문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수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 드디어 지옥의 문 앞에 선 설종은 심호흡을 몇 번 한 뒤 두려운 마음으로 노크를 했다. 똑똑 소리가 무슨 굉음처럼 크게 들렸다.
 "들어 와."
 '미친 년. 저렇게 음산한 목소리가 어디가 섹시한 거야? 섹시가 지난 겨울에 다 얼어 죽었나?'
 애꿎은 항아를 욕하며 그녀가 쭈뼛쭈뼛 의국으로 들어가자 책상에 앉아 컴퓨터 모니터를 보고 있던 경진이 몸을 돌렸다. 의자에서 쭉 뻗은 그의 다리가 엄청나게 길었다. 설종은 꾸벅 인사를 했다.
 "샘, 부르셨습니까?"
 "김설종."
 "네, 샘."
 "너 916호 CRF 정진화 환자 주치의지?"
 설조으이 머리가 마구 돌아갔다. 몇 번 눈을 깜빡이다 번쩍 정신이 든 그녀는 심장이 툭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아침에 치프가 분명히 I&O 체크 오더 내라고 했는데 잊었다. 설종은 죽었다 싶은 생각에 차라리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이제 왜 불렀는지 알겠나?"
 ".......네."
 모기 소리만큼 작게 대답하며 설종은 이제 곧 뭔가가 날아오리라 생각하며 각오를 단단히 했다. 카운트다운, 텐, 나인, 에잇........
 "너는 대체!"
 '스타트!'



 설종이 고개를 팍 숙이는데 갑자기 의국 문이 벌컥 열리더니 동욱이 불쑥 들어왔다. 그는 화난 표정의 경진과 기가 팍 죽은 설종을 번갈아 보더니 들고 있던 책을 탁자 위에 텅 던지고 끼리릭 의자 끌리는 소리를 내며 중간에 떡하니 앉았다.
 "분위기가 왜 이러냐? 너 또 쟤 까는 중이었어?"
 동욱이 따지듯 묻자 뭐라 할 듯 입술을 달짝이던 경진이 몸을 뒤로 젖히고 의자에 푹 파묻혔다. 경진이 한 손을 내저으며 설종을 물리쳤다.
 "김설종, 그만 가 봐. 제발 정신 좀 차리고."
 "네, 그럼."
 천만다행으로 동욱이 끼어들어 대형 참사를 면한 설종은 의국을 나오는 순간 표정이 돌변하면서 희열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양팔을 쭉 펼쳐 하늘을 받치며 자비로운 신께 감사했다.
 "으아, 신이시여, 저를 버리지 않으셨군요. 살다보니 이렇게 날로 먹을 수도 있었네요. 권동욱 샘, 복 받으실 거예요! 장가갈 때 축의금 왕창 넣어 드릴께! 아싸! 음미 좋은 거!"
 그렇게 설종이 펄쩍펄쩍 뛰면서 룰루랄라 사라진 뒤에도 의국안의 동욱은 여전히 묘한 눈빛으로 경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봐."
 경진이 퉁명스레 한마디 했지만 동욱은 빤히 그를 살피며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어떻게 보면 잘생긴 것 같기도 하고..........너 나 몰래 쟤 앞에서 웃어 준적 있었냐?"
 "뭐?"
 "어떻게 꼬였어? 방법이나 좀 알자."
 "대체 무슨 소리야? 뭐 잘못 먹었어?"
 경진이 이마를 찌푸리자 동욱은 졌다는 듯 양 손바닥을 내보이며 고개를 돌렸다.
 "쟤가 너 좋아한단다."
 "뭐라고?"
 "입국식 날, 룸살롱에서 펑펑 울더라. 네가 너무 좋은데 안 받아줘서 힘들다고. 자식아! 불쌍한 애 좀 그만 괴롭혀. 어유, 복 터진 놈!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을 싸는 구나."
 동욱은 억울한 표정으로 경진의 다리를 걷어찼다. 더욱 황당한 표정으로 경진이 동욱을 올려다봤다.
 "지금 김설종 말하는 거야?"
 "그럼 누구겠냐? 나쁜 놈! 인턴 때부터 널 짝사랑했다더라. 왜, 좋냐?"
 갑자기 경진의 말문이 턱 막히더니 가슴이 조여 오며 관자놀이가 확 붉어졌다. 경진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안경을 밀어 올리며 눈을 깜빡였다. 속에서 열이 확 치받는 느낌이었다. 달아오른 경진의 얼굴을 본 동욱이 한쪽 입술을 들어 올리며 씨익 비웃었다.
 "몰랐겠지. 알았으면 그렇게 못 갈구지. 이젠 좀 봐 줘라. 애가 가엾지도 않냐?"
 "그럴 리가 없어. 네가 잘못 알았겠지."
 "어쭈? 제법 뺄 줄도 알고."
 경진은 더 이상 동욱의 헛소리를 상대하고 싶지 않은 듯 몸을 돌려 컴퓨터 마우스를 잡았다. 그런 그의 뒤통수에 대고 지친 목소리로 동욱이 중얼거렸다.
 "그래, 그래. 내가 잘못 들었다고 하자. 그러고 싶으시면 그러시던가. 마음대로 하세요!"
 동욱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섬주섬 책을 주워 들고 의국 안쪽 침실로 걸어갔다. 문손잡이를 돌리는데 경진의 중얼거림이 그의 발목을 낚아챘다.
 "..........장난치는 거면 죽을 줄 알아."'
 그 말에서 느껴지는 험한 살기에 동욱의 눈썹이 위로 치떠졌다.
 '자식이, 진심이구나.'
 그는 풀기 없는 헛웃음을 웃었다. 그러나 동욱이 뒤돌아 경진을 마주했을 때는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본인한테 직접 들었어. 필요 없으면 말해. 내가 가진다."
 동욱의 선언을 듣는 순간, 경진은 가슴 아래 부분이 날카롭게 후벼지는 착각을 느꼈다. 대부분의 삶을 장난기로 채우는 동욱이지만 아주 드물게 진지해질 때가 있었고 그것이 바로 지금이었다. 그의 말이 전하는 의미를 머릿속으로 이해하려 애쓰며 경진은 동욱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야. 내가 시작해도 상관없는지 묻고 있는 거라고."
 "너, 설마?"
 "그래. 네 생각대로야. 말해. 건드리지 말라면 그래 주지."
 도전하는 듯한 동욱의 눈빛에 경진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이성은 백 번이고 '상관없다' 소리치라고 그를 윽박질렀지만 이상하게 입 안의 혀가 움직여지질 않았다. 경진의 복잡한 시선을 마주하던 동욱은 잠시 후 시선을 아래로 피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뭐, 싫지 않으면 좀 잘해 주던가. 알다시피 힘들때잖아? 어설퍼 못 봐주겠으면 붙잡고 제대로 가르치든가. 무조건 억누르지만 말고."
 그리고는 동욱이 침실의 문을 열었다. 한 걸음 내딛는데 경징의 날선 목소리가 그의 등을 후려갈겼다.
 "상관없어."
 그 말을 듣고도 동욱은 잠깐 주춤했을 뿐, 이윽고 말없이 침실로 들어갔다. 책을 그곳에 놓아두고 밖으로 나온 동욱은 주머니의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하늘에 뜬 구름이 흐르듯 밀려갔다. 점점 타들어 가는 담배 끝을 검지로 튕긴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바보 같은 자식, 결국 못 빠져나오는 거냐?.......불쌍한 놈."
 언뜻 그의 눈동자가 물기로 흐려졌다.

 경진은 아무도 없는 의국에 앉아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뭔가 동욱이 자신을 급하게 떠밀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동욱의 마음을 헤아리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동욱이 설종을 마음에 두었다면 그에게는 자신이 걸림돌이 될 터이니 이 순간 결정을 강요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경진으로선 그럴 수밖에 없는 대답이었는데도 이상하게 까닭 없는 분노가 그의 가슴 속에서 울컥 치밀었다. 여태 설종을 어찌해 보겠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니지만 두 사람이 나란히 선 모습을 상상하는 건 그의 기분을 어쩐지 불쾌하게 만들었다.
 문득 그는 자신이 아까부터 계속 같은 페이지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몇 페이지 전부터의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더불어. 그는 한숨을 쉬며 컴퓨터를 꺼버렸다.
 그가 지금 가진 감정의 그릇.
 그 방향을 어디로 향해 쏟아 부을지를 결정해야 할 때가 왔다. 동욱의 앞에서는 상관없다 말함으로써 그 그릇을 집어던져 와장창 깨어 버린 격이 되었으나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이미 그는 그 깊은 물에 잠겨 허우적대며 괴로워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구질구질한 건 질색이었다. 지금이라도 깨끗이 손을 털고 가버리고 싶었으나 늪과 같이 질척이는 기묘한 설렘이 그를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새카만 유리처럼 빛나는 설종의 눈동자가 떠오르자 그의 가슴이 순간 검은 파도처럼 높이 일러였다.
 경진은 피곤한 기색으로 의자에 목을 젖히고 누웠다. 어둠 속에 잠긴 그의 눈빛은 짙게 가라앉아 있었으나, 경진은 자신의 마음 깊은 심연에 감춰진 은밀한 결정을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저녁 시간, 설종은 내과중환자실에 앉아 검사지를 정리하고 있었다. 오늘 그녀는 중환자실 당직이었다.
 "아까 ABGA 수치가 어떻게 되더라........? 여기 있구나."
 중얼중얼 입으로 숫자를 외며 부지런히 적어대는데, 머리 위에서 간호사가 그녀를 불렀다.
 "김 선생님. 정현식 환자 Subclavian vein(쇄골하 정맥)에 CVC insertion 오더 있는데요?"
 "그래요?"
 설종은 차트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준비 좀 해 주실래요? 저 손 씻고 올게요."
 "네."
 설종은 중환자실 옆에 마련된 개수대에서 소독비누로 손을 깨끗이 씻었다. 쇄골 정맥에 카테터를 넣는 일은 고도의 테크닉이 요구되는 시술이었고 완전한 멸균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설종이 손을 씻고 오자 간호사가 멸균 타올을 내밀었다. 손을 닦고 마스크 쓰고 수술복까지 갖춰 입은 그녀는 베타딘 코튼 볼로 환자의 쇄골 부분에 소독액을 펴 바른 뒤 소독포를 펼쳤다.
 "리도카인(lidocaine)."
 마취제를 주사하고 손가락으로 꼭꼭 누르는데 누군가 환자의 침대로 다가왔다. 그것이 치프 경진인 것을 알자 설종은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 시간에 중환자실에는 웬일일까?
 "샘, 왜.......?"
 "계속해."
 경진이 턱짓을 했지만 순식간에 마음의 평화를 잃은 설종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머뭇거렸다. 요즘은 사실 치프 목소리만 들어도 오금이 저렸다. 어찌나 갈궈 주시는지 말이다. 카테터를 쇄골 정맥으로 쓱쓱 끼워 넣는데 자꾸 그의 눈치를 살피게 되었다.
 "왜 그리 손을 떨어?"
 "보시니까.........떨려서."
 '알아서 꺼지란 뜻이다, 새꺄! 네놈은 눈치라곤 개똥만큼도 없냐?'
 설종이 속으로 악을 썼지만 치프는 작정하기라도 한 듯 움직일 생각이 없어보였다. 결국 눈치 줘서 쫓아내기를 완전히 포기한 그녀는 아예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카테터 삽입에만 집중했다. 멸균 장갑 안에 싸인 설종의 가늘고 섬세한 손가락이 움직이는 곳마다 경진의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다녔다.
 "헤파린(heparin)."
 혈전을 예방하는 약을 넣어주고 넓은 반창고를 붙여준 뒤 설종은 장갑을 벗었다. 겨우 1,20여 분에 불과한 시간이지만 몇 시간 수술보다 더 긴장했다. 맞는 위치에 제대로 들어갔는지 확인하기 위해 포터블 엑스레이까지 찍고 나서야 카테터 삽입이 완전히 마무리가 되었다. 잠시 후 경진이 엑스레이 사진을 보고 있는 곳으로 슬그머니 다가간 설종이 고개를 쓱 들이밀었다.
 "어때요?"
 "제대로 들어갔어. 잘했어. 이렇게 하면 돼."
 치프가 고개를 끄덕이자 설종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시방 이 인간이 칭찬을 해준 것이라고라?'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경진을 멀거니 보던 설종의 표정이 순식간에 확 밝아졌다.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처럼 반가운 칭찬에 왠지 눈물이 솟을 만큼 가슴이 뛰었다. 하얗고 고른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는 그녀를 경진이 두 눈을 깜빡이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그를 가까이 마주보언 설종은 안경너머 경진의 눈동자를 흘끔거렸다.
 '색깔이.....이상해. 검은색이 아니고 하늘색, 보라색, 연두색이 섞여 있어.'
 한국인답게 당연히 검은색인 줄 알았던 눈동자가 오묘한 무지개 빛깔이란 것을 발견하자 설종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혼혈인가?'
 그녀가 그런 생각에 빠진 사이 경진이 몸을 돌리더니 스테이션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김현아 환자 차트 줘 봐."
 "네, 샘."
 다행히 위 절제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나온 현아는 지금 내과 중환자실에 입원 중이었다. 그녀의 차트를 살피며 몇 가지 기록하던 그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슈처 준비하고 글러브 좀 준비해."
 "네, 샘. 글러브 팔(8) 쓰시죠?"
 설종이 그렇게 말하며 뛰어가자, 경진이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다. 보통 7이나 7반을 쓰는 남자들과 달리 손가락이 굉장히 길고 손이 큰 편인 경진은 8호를 썼다. 그런 소소한 사실까지 설종이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자 그의 가슴 언저리가 찌릿해지더니 새삼 동욱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인턴 때부터 열렬히 짝사랑했다고 하더라. 네가 안 받아준다고 펑펑 울더라.'
 머릿속을 울리는 동욱의 목소리를 쫓으려는 듯 경진이 고개를 털며 이마를 찡그렸다. 그러나 글러브 껍데기를 찢어 소독 트레이에 떨어뜨리는 설종의 마음은 그의 설렘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으니.
 '이 자식은 산적같이 비아그라 손만 더럽게 커 가지고서는! 쨔샤! 네놈은 밥 처먹고 손발만 키웠냐? 네 솥뚜껑같이 큰 손을 내가 잊어버리려고 해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누군 6반 쓸 만큼 손이 섬세한데.........'
 착각에 빠진 경진은 꿈에도  몰랐지만 설종의 솔직한 속마음은 그랬다. 치토스 박 치프의 귀족같이 아름답고 가느다란 손을 다시금 떠올리던 설종이 한숨을 삼켰다. 정말 잊기로 마음먹었는데, 가끔씩 솟구치는 그리움은 허락도 안 받고 그녀를 괴롭혔다.
 경진은 현아의 입에 꽂힌 인공호흡기 모니터를 잠시 살핀 뒤 그녀의 CV 카테터를 새 것으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외과를 하지, 왜 내과를 지원했을까?'
 능숙한 손놀림으로 봉합을 하는 경진을 보고 설종은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커다란 손이었지만 믿을 수 없을 만큼 세심하고 재빠르게 움직였다. 경진의 쭉 뻗은 긴 손가락은 말할 수 없도록 매혹적이었다. 설종이 도저히 눈을 떼지 못할 정도였다.
 봉합을 마친 경진은 글로브를 벗더니 물을 적신 거즈로 현아의 얼굴을 조심히 닦아주었다. 그 차가움에 잠시 눈을 떴던 현아가 경진에게 눈길을 주더니 다시 잠에 빠져버렸다. 아련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는 경진의 옆모습이 어쩐지 슬퍼보였다.
 '콧날이, 잘 섰네. 입술 선도 또렷하고.'
 경진의 옆얼굴을 훔쳐보던 설종은 약간이지만 감탄했다.
 '저렇게 또라이만 아니면 여자도 좀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콧날이 시큰해지며 치프가 조금 불쌍했다. 인간은 인간다워야 짝이 생기는 법. 그렇게 앉아 있던 경진이 몸을 일으키더니 설종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 환자, 잘 보고 이상 있으면 노티해. 내일은 벤틸레이터 위닝 시작해야겠어."
 "네, 샘."
 "수고해."
 경진이 중환자실을 나가자 설종은 누운 현아를 새삼 물끄러미 보았다. 파란 혈관이 비칠 만큼 하얀 얼굴, 크고 맑은 눈동자, 붉고 예쁜 입술.
 '이런 타입을 좋아하는 구나.'
 경진이 그렇게 정감 있는 눈빛으로 누군가를 보는 모습은 처음이었던 설종이라 어쩐지 현아에게 눈길이 갔다. 문득 자신이 준 초콜릿을 경진이 현아에게 주었던 일이 생각나자 설종은 살짝 기운이 빠졌다. 그런 자신이 우스웠던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아까하다 말았던 검사지 정리를 마치러 스테이션으로 돌아갔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