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September 25, 2019

그녀의 정신세계 #5 (삽질은 삽질을 낳고)

회진을 마치고 병동을 도는데, 설종은 자꾸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상하게 앞이 어질어질하고 현기증이 나는 것이 몸 상태가 평소와 달랐다.
 '요즘 너무 무리를 했구나.'
 계속 잠을 제대로 못 잔데다 어젯밤엔 당직까지 섰더니 몸살이 난 모양이었다. 뺨이 자꾸 화끈거렸다.
 "쫑, 괜찮아? 어디 아픈 거 아냐?"
 "뭐, 그냥. 몸살기가 있네."
 "큰일이다. 열나는 거 아니니?"
 항아가 걱정스런 눈으로 물었지만 설종은 힘없이 웃었다. 차라리 큰 병이면 당당하게 입원이라도 할 수가 있지만 몸살감기쯤은 불치병이 난무하는 병동에서 명함도 못 내밀었다. 그런 걸로 아프다고 누우면 선배들의 눈총을 피하기 어려웠다.
 "이러다 말겠지. 해열제 있니?"
 "잠깐만. 내 책상 서랍에 있어. 갖다 줄게."
 항아가 사라진 뒤에 스테이션에 잠시 엎드려 있던 설종은 곧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김설종. 어제 당직 스케줄표 만들라는 거 다 했어?"
 치프가 그녀에게 묻자 설종은 고개를 저으며 기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젯밤에는 너무 바빠 미처 할 시간이 없었다.
 "아직 못 했는데요."
 "오늘 저녁 회진 전까지는 해 와. 그리고 박선호 환자 사진 찍은 거 어디 있어?"
 "네, 그건 이쪽에 ....."
 설종이 의자에서 일어나 한 걸음 떼는 순간, 속에서 구역질이 나더니 시야가 새까맣게 변했다. 그녀는 안간힘을 써서 쓰러지지 않으려 버텼다.
 "왜 그래?"
 비틀거리는 그녀를 불안한 눈으로 보던 경진이 조금씩 다가오며 물었다.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안 나왔다. 잠깐 눈을 감고 있으니 괜찮은 것 같아 한 발짝 옮긴 순간, 설종은 그 자리에 쓰러졌다. 긴 다리로 성큼 뛰어온 경진이 다행이 그녀의 몸을 받았다.
 "김 선생, 김설종!"
 치프가 쓰러진 그녀를 품에 안고 마구 흔들었지만 설종의 의식은 까무룩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설종이 혼절하자 경진은 품에서 펜 라이트를 꺼내 동공부터 살폈다. 별 이상이 없는 것으로 보아 뇌출혈은 아닌 것 같았지만 뺨에 손을 대어보니 열이 심하게 났다. 그때 워드로 돌아온 항아가 깜짝 놀라 소리를 쳤다.
 "어머, 쫑아! 얘 왜 이래요?"
 "syncope(기절)이야. fever(열)도 있고. 김 선생 어디 아픈가?"
 "네. 아침부터 몸살기가 있다고 했어요. 요새 계속 잠을 못 잤거든요."
 항아의 말을 듣던 경진이 설종을 등에 업고 턱짓을 했다.
 "권동욱 선생한테 이 차트 갖다 주고 잠깐 외래 좀 봐달라고 해. 내가 김 선생 숙소에 데려다 줄 테니."
 "네. 다녀올게요."
 항아가 경진이 부탁한 차트를 들고 사라지자 그는 설종을 업은 채로 숙소로 뛰듯이 걸어갔다. 침대에 설종을 눕힌 그는 책상 주위를 둘러보며 체온계를 찾았다. 서랍을 드르륵 열어 눈으로 쓱 훑었지만 체온계는 눈에 띄지 않았다. 반항아더러 오는 길에 챙겨오라고 전화해야겠다고 생각한 그때, 작은 편지지가 경진의 눈에 띄었다. 봉투에 '박 치프 선생님께.'라고 쓰여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고개를 들고는 누운 설종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가 여전히 눈을 꼭 감고 자는 것을 확인하자 가만히 손을 뻗어 핑크빛 편지지를 펼쳤다.
 '존경하는 박 선생님께' 로 시작된 편지지를 쭉 읽은 그의 얼굴이 웃는지 찡그리는지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묘하게 굳어버렸다. 그때 복도에서 울리는 발소리를 들은 그는 얼른 편지를 자기 가운 주머니에 집어넣고 서랍을 닫아버렸다. 문이 벌컥 열리며 항아가 들어오자 경진은 평소와 다름없는 낮고 굵은 목소리로 물었다.
 "체온계 있어?"
 "네. 제 책상에."
 항아가 체온계를 가지러 가자 경진은 문으로 걸어가며 그녀에게 당부했다.
 "체온 재어보고 열 있으면 해열제 먹이고 수액 좀 달아 줘. 오늘 하루는 푹 쉬게 하고."
 "네, 샘."
 설종의 숙소를 빠져나오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경진은 걸음을 멈춰 설 수 있었다. 손을 들어 이마를 짚는데 난데없는 식은땀이 만져졌다. 땀이 묻어난 자기 손을 낯설게 바라보던 그는 실소를 머금었다. 가운 주머니에 든 핑크빛 편지지가 자꾸 신경이 쓰였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편지를 꺼냈다. 작은 편지지지만 그의 마음을 휘젓기엔 충분했다.
 '편지는 차마 못 주고 초콜릿만 준 걸까.'
 그녀가 주었던 커다란 초콜릿이 문득 생각이 났다. 설종에게 받은 뒤 가운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것을 현아가 무척 부러운 눈으로 보기에 어쩔 수 없이 주긴 했지만 그날 내내 마음이 쓰이던 것이었다. 그는 잠시 훔친 편지를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그냥 버릴까 하는 생각에 둘러보니 마침 바로 옆에 쓰레기통이 보였다.
 그는 잠시 쓰레기통을 바라보다 대신 그 편지를 가운 속, 와이셔츠 주머니 안으로 깊숙이 넣어버렸다. 그런 뒤경진은 자기 대신 외래를 보고 있을 동욱과 교대하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붉게 상기된 것이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화난 듯 일부러 입매를 꽉 다물고 있었지만 언뜻 눈동자에 스쳐가는 설렘은 지우기가 어려웠다.
 설종이 정신이 든 것은 점심때가 지나서였다. 창백한 얼굴로 몸을 부스스 일으킨 그녀는 자신이 숙소에 누워 자고 있었던 것을 알고 어리둥절했다. 잠시 망설이다 항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반.나 어떻게 된 거야?"
 [너 워드에서 신콥해가지고 치프 샘이 업고 왔어.]
 "진짜?"
 설종의 눈이 동그래졌다. 쓰러지면 갖다버리라고 할 놈이지 업고 올 인간은 아닌데, 치프가 대체 웬일인가 싶었다.
 [그래. 너 오늘 푹 쉬게 하래서 당직도 진우가 땜빵 서는 중이다. 나중에 진우한테 고맙다고 해. 나 바빠. 끊어.]
 항아가 전화를 끊었지만 벌어진 설종의 입은 쉽게 다물어지지 않았다.
 "이 인간이 뭘 잘못 처먹었나? 아니면 죽을 때가 된 건가. 흐미! 엄니, 나 이러다 난중에 덤터기 쓰는 거 아닌감유?"
 그동안 둘째간다면 서러울 만큼 자신을 갈구던 치프가 갑자기 보드랍게 나오자 덜컥 겁이 난 설종은 불안감에 떨며 어쩔 줄 몰라했다. 잘 해줘도 행복한 줄 모르는, 참 불쌍한 인생이었다.
 "이게 뭐야?"
 저녁 시간, 식당에 내려와 밥을 먹는 경진의 테이블에 슬그머니 다가온 설종이 음료수 하나를 건네자 그가 의외란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냥요. 샘 드시라고요. 식사 맛있게 하세요."
 설종은 고개를 꾸벅 하고는 항아가 기다리는 제 테이블로 돌아갔다. 경진은 그런 설종의 뒷모습을 슬쩍 바라보다 다시 묵묵히 식사를 계속했다. 경진은 밥 먹는 내내 그녀가 준 음료수는 한 번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식사를 모두 마쳤으나 식당을 나서는 길, 그의 가운 주머니는 음료수 캔 하나가 버젓이 들어있었다. 그 음료수는 바로 문제의 '게토레이'였다.
 "진짜로 들고 갔어. 나중에 알면 어쩌려고 넌 치프 샘한테 저런 걸 주니?"
 항아가 염려하는 눈빛으로 설종의 옆구리르 쿡 쳤지만 그녀는 태연했다.
 "말 안 하는데 어떻게 알아? 너나 자영이만 입조심하면 아무도 몰라."
 "난 왠지 자꾸 불안하다,얘."
 "뭘 그래. 좋은 맘으로 줬어. 나 업어 줘서 고맙다고."
 과연 설종이 좋은 맘으로 게토레이에게 '게토레이'를 줬을까, 의심스러운 항아였다. 두 사람이 식사를 마치고 당직실로 왔을 때, 진우와 영식은 백지를 가운데 두고 뭔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었다.
 "어, 잘 왔다. 월궁, 쫑! 우리 이달 야식비 동났다. 사다리 타기해서 모아야 할 시기가 왔어."
 "내가 돈이 어디 있냐? 먹고 죽으려 해도 없다."
 "그럼 오늘 밤부터 야식으로 피자 시켜도 쫑 넌 절대 안 준다?"
 "아 씨, 알았어. 난 1번."
 "월궁항아는 몇 번?"
 "난 3번."
 그때 당직실 문이 열리며 치프가 불쑥 들어왔다. 떠들썩하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잠잠해졌다. 경진이 설종을 보며 손짓을 했다.
 "혹시 스케줄 표 작성했어?"
 "아, 네. 잠깐만요."
 오후에 잠시 쉬는 동안 완성해 놓은 스케줄 표를 설종이 찾는데, 나머지 세 사람은 소리를 죽인 채 계속 사다리를 타고 있었다. 그러다 모두들 크게 웃으며 설종을 가리켰다.
 "쫑, 넌 3만 원 당첨!"
 "아, 뭐야! 뭐가 그렇게 비싸!"
 설종이 투덜거리는데, 문 앞에 서 있던 경진이 진우에게 넌지시 물었다.
 "지금 뭐하나?"
 "아, 예. 야식비 사다리 타고 있습니다. 치프 샘도 괜찮으시면 동참하시죠. 고통을 분담하는 사회, 아름답지 않습니까?"
 넉살 좋은 진우가 너스레를 떨자 경진이 피식 웃더니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척 꺼냈다.
 "자, 보태."
 눈처럼 하얀 수표가 나오자 다들 탐욕에 어른거리는 눈빛을 빛내며 기쁜 함성을 질렀다.
 "수표! 수표!"
 그중에도 영식은 박수까지 쳐가며 희열의 함성을 외쳤다.
 "치프 샘, 감동입니다. 끝내줍니다."
 "멋져요, 샘!"
 그 어수선한 와중에 스케줄 표를 찾은 설종이 경진에게 내밀자 그는 그것을 받고 돌아섰다.
 "다들 수고해라."
 "네. 샘. 살펴 가십시오."
 경진이 나가자 흥분한 항아가 발갛게 달아오른 볼을 하고 황홀하게 중얼거렸다.
 "자, 보태! 그러면서 수표를 슥! 아, 너무 멋져. 어떡해!"
 "지랄을 떤다."
 설종이 심드렁히 말했지만 항아는 한껏 들떠 조잘거렸다.
 "넌 기절해서 몰랐을 테지만 너 업고 갈 때도 얼마나 괜찮았는데.기럭지가 되니까 뭘 해도 폼이 나는 게! 나 정말 반할 것 같아."
 항아의 말을 들으면서도 설종은 어딘가 불편한 마음으로 이마를 찌푸리고 있었다.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벌어진 사태를 냉철하게 분석했다.
 '치프 그 인간이 항아를 좋아하는 게 틀림없스야.'
 그렇게 생각하니 아귀가 척척 맞아 들어갔다. 자신을 업어준 것도 친구 항아에게 멋있게 보이고 싶어서이고, 수표를 척 꺼낸 것도 항아 먹으라고 아낌없이 퍼준 것이다. 설종은 눈을 돌려 항아를 보았다. 예쁘고 똑똑하고 착한 친구였다. 치프도 설종 혼자 싫어해서 그렇지 객관적으로 보면 키크고 일 잘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둘이 나란히 서면 그렇게 잘 어울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슴 어딘가가 묘하게 허전했다. 그렇게 싫어하고 욕하던 남자였는데, 막상 그의 마음에 든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하니 아랫배가 찌르르 쑤셨다.
 "정이 더럽다더니, 미운정이 들었을 줄이야."
 "뭐라고?"
 "아냐. 야, 치프가 10만원이나 냈으니 이번 사다리는 무효로 하는 거다?"
 "김설종, 그깟 3만 원 안 내려고 악을 쓴다? 그래, 아무튼 좋다. 무효로 해 주마."
 치프 때문에 가장 덕을 본 것은 자신이면서 그의 마음이 이어지는 길은 짐작조차 못하는 설종을 어리바리의 원조라 불러도 아깝지 않으리.

 무슨 일이든 한 번 오해하여 짙은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수습이 어려울 만큼 걷잡을 수 없이 돌아가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설종은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채 그 파멸의 길로 한 발짝 한 발짝 착실히 들어서고 있었다.
 영원한 천적 게토레이 치프(줄여서 게칲이라 하자)와 자신의 동거녀 반항아와의 염문설이 그녀의 레이더에 띠띠띠 포착된 이후로 설종의 예민한 더듬이는 줄곧 꼿꼿이 세워진 채 산들바람에도 마구 흔들리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백 일 당직 중에도 며칠에 한 번씩 남자 맛을 보았다는 항아의 놀라운 증언과 게칲이 느끼한 표정으로 돈지랄하며 꺼낸 하얀 수표에 열광하던 친구의 모습을 종합해 보건대, 하루 만에 타당한 결론이 튀어나왔다.
 '그년이 며칠 전에도 응응응 했다는 미스테리한 상대놈이 게칲이 맞지라. 틀림이 없지라.'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척척 맞아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일단 확신이 생기자 뭉글뭉글 피어나는 설종의 상상력이 뿌연 영상을 조합해내기 시작했다. 육욕에 못 이긴 항아의 붉은 입술에서 날름거리는 혀가 게칲의 가슴을 핥자, 게칲이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마구 항아에게 키스하며 애무를 시작하고..........
 "대답하라니까, 김설종, 뭐하나!"
 "네, 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설종이 두 눈을 깜빡거리고 있자 질문을 던진 경진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이 환자의 경우 청진 소견을 말하라고!"
 "아, 저."
 의국 컨퍼런스 시간에 딴 생각에 푹 빠져 질문에 대답할 타임을 놓쳐버린 설종은 그제야 사태를 파악하고 어쩔 줄 몰라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녀가 머뭇거리자 치프가 이마를 세게 찌푸렸다.
 "정신 안 차리지? 반 선생, 네가 대답해 봐."
 "네. 췌장 두부암의 경우는 십이지장을 압박하기 때문에 위에서 소장으로 음식물이 잘 내려가지 않아 청진시 역류음이 들립니다."
 똑 부러진 항아의 대답에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경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 선생, 잘했어. 김설종, 넌 컨퍼런스 마치고 의국으로 와!"
 항아에게는 따사로운 눈빛으로 웃어주면서 자신에게는 독사 같은 표정으로 이를 드러내는 경진의 이중성에 설종은 몸서리를 쳤다. 슬쩍 옆을 보니, 친구가 떡이 된 건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지 저 칭찬 좀 받았다고 볼을 발그레 붉히며 배시시 웃는 반을 보니 더욱 배신감이 뼛속에 사무쳤다.
 '이런 잡것들! 그래 두 연놈이 잘 처먹고 잘 살아라.'
 이래서 사내연애는 금지한다는 말이 나왔나보다. 단체생활 직장인의 능률성을 현저히 저하시키는 원인이 백 번 되고도 남았다. 누가 드러란 것도 아닌데 괜히 혼자 열 받은 설종은 입을 닷 발이나 내밀고 컨퍼런스 발표에 집중했다. 그렇게 컨퍼런스를 다 마치고 야단맞으러 의국에 불려간 설종은 또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경진의 꾸중을 들어야했다.
 "제발 정신 좀 차려라. 딴 생각 안 하면 졸고 있고, 대체 왜 그래? 1분 1초도 허비하지 않고 보내야 하는 시간에!"
 '이 인간은 어찌 그리 귀신같이 내가 졸 때나 딴 생각할 때를 잘도 집어내나 몰라? 보면 항아도 딴 짓 할 적 많구만, 그때는 절대 안 들키던데......혹시 봐 주는 것 아냐? 맞당께! 알고 보니 이것들이 다 짜고치는 고스톱이었당께!'
 순간적으로 스쳐가는 깨달음에 그녀의 눈빛이 반짝였다. 괜히 억울함이 울컥 솟구쳐 올랐다. 그녀는 슬그머니 눈을 들고 야단치는 경진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반이 저런 스타일을 좋아했던가?'
 지적인 인상을 강조하는 검은 뿔테와 그 안에 든 신기한 색깔의 눈동자가 다시 눈에 밟혔다. 안경 벗기고 똑바로 좀 봤으면 소원이 없을 텐데, 지금 그런 짓을 하면 사표를 써야할지도 몰랐다.
 "아무튼, 똑바로 해."
 "알겠습니다."
 설종이 고개를 꾸벅 숙이는데,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며 항아가 들어왔다. 방긋 웃는 얼굴이 매일 보는 설종의 눈에도 기똥차게 예뻤다. 설종은 눈동자를 슥슥 굴려 두 연놈이 하는 작태를 살폈다. 설마 여기서 일을 벌일 작정인가. 여태 이렇게 은밀한 정사를 수없이 벌여왔던 것일까.
 "어, 반 선생. 들어와. 김 선생은 나가 봐."
 '세상에, 나까지 내보내고 둘이 진짜로 시작하려고?'
 설종은 계속 뭉그적거리고 있었지만 그가 나가라고 눈짓을 하자 어쩔 수 없이 비적비적 밖으로 나갔다. 문을 닫는 척하면서 아주 약간 열어둔 그녀는 한쪽 눈을 감고 의국 안을 몰래 살폈다. 치프는 설종이 들어왔을 때와 다름없이 의자에 앉아 있고 반은 그 앞에 서서 뭐라 뭐라 계속 말을 하고 있었다.
 '시방 뭐시라 시부렁거리는 것이여? 옷은 언제 벗기나? 그냥 안 벗고 하나?'
 대화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아 그녀가 바짝 귀를 기울이는데, 갑자기 누군가 뒤에서 설종이 덮치며 고함을 질렀다.
 "왁!"
 "워매!"
 하던 짓이 하던 짓이라 정말이지 심장이 떨어질 만큼 놀란 설종이 쟁반처럼 둥그런 눈으로 돌아보니 동욱이 얼굴에 온통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여기서 뭐해?"
 "몰라요! 놀랐잖아요."
 신경질도 나고 몰래 훔쳐보았던 것이 너무나 부끄러웠던 설종은 소리를 버럭 지르며 그를 밉게 쏘아보고는 얼른 도망쳐버렸다. 그녀가 뛰어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동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의국 안에 경진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경진이가 어지간히 좋기는 좋은 모양이네. 문밖에서 몰래 훔쳐보기까지 하고."
 '제대로 된 대화'라는 것을 모르는 채 자기만의 세계에 푹 빠진 헛다리 삽질 콤비들의 오해는 그렇게 날로 깊어만 갔다. 통탄할 일이로고.

 점심시간, 수술 환자를 보느라 밥 때를 놓쳐 버린 설종은 뒤늦게 혼자 식당으로 내려갔다. 배식 시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어선지 식당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좋아하는 갈비찜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녀는 기쁜 마음으로 한 주걱 떠서 식판에 얹었다. 창가에 앉아 밥을 먹는데, 테이블로 누군가 다가왔다. 눈을 들어보니 경진이었다.
 "어, 샘. 식사하시죠."
 "음."
 설종이 놀라 허리를 펴자 경진은 슬쩍 고개를 끄덕여준 뒤 그녀 맞은편에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이놈의 자식은 하고 많은 자리를 두고 왜 내 앞에 앉는 것이냐. 눈치 보여 밥도 안 넘어가게 시리.'
 설종은 속으로 구시렁대며 고개를 푹 숙이고 갈비찜만 열심히 뜯었다.
 '아,씨. 짜증나게 갈비찜은 오늘따라 또 왜 이리 맛있는 것이야.'
 맘 같아선 식판을 들고 일어나 갈비찜을 더 받아오고 싶었지만 왠지 그러자니 게칲이, 넌 걸신이라도 들렸냐고 욕할까 봐 쪽팔려서 그러지도 못하고, 설종은 뼈다귀만 아쉽게 쪽쪽 빨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경진이 제 식판에 있던 커다란 갈비찜 덩어리를 집어 그녀의 식판에 놓아 주었다. 놀란 설종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았다.
 "어머! 샘은 안 드세요?"
 "난 별로."
 "되게 맛있는데........왜 안 좋아하시지?"
 설종이 혼잣말로 중얼거렸지만 그는 눈을 내리깔고 묵묵히 식사를 계속했다. 설종은 그런 그를 흘끔 보다 갈비를 들고 맛있게 뜯기 시작했다.
 '인간 망종인 줄 알았더니, 제법 인정머린 있구먼 . 좋다. 이만하면 항아 짝으로 손색이 없어. 넌 합격! 아, 입 안에서 살살 녹는다, 녹아.'
 갈비찜 한 덩이에 친구를 팔아넘긴 설종은 행복하게 식사를 마쳤다. 그녀는 옆에 있는 자판기에서 뜨거운 커피를 두 잔 뽑아 테이블로 가져왔다.
 "샘, 커피."
 "어."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커피를 홀짝이며 말없이 앉아있었다. 그러다 경진의 눈치를 살피던 설종이 흠흠 헛기침을 하고 벼르던 말을 꺼냈다.
 "저.......샘. 반항아 선생 있잖아요."
 "음."
 "예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설종의 물음에 경진이 의아한 시선으로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잠시 눈을 깜빡이던 그는 선선히 대답했다.
 "예쁘지. 그 정도 예쁘기도 쉽지 않지. 근데 왜?"
 경진이 수긍하자 설종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역시. 좋아하는구먼. 하아, 항아야, 요년아. 이 언니한테 나중에 고맙다고 절해라.'
 설종은 방긋 웃으며 열심히 친구의 칭찬을 했다.
 "그냥요. 같은 여자인 제가 봐도 항아는 예쁘고, 착하고, 똑똑하고 일 잘해요. 안 그래요?"
 "잘 아네. 그런데 넌 반 선생 보면서 느끼는 거 없어? 나도 이제 사고 그만 치고 일 좀 잘해봐야겠다는, 뭐 그런 생각."
 경진이 갑자기 화제를 돌려 그녀를 구박하자 설종의 얼굴이 확 굳었다.
 '새꺄! 그래 항아 년은 잘나 빠졌고 난 개털이다, 왜? 네가 보태준 거 있냐?'
 잠시 성깔이 치솟긴 했지만 그놈의 우정이 뭔지, 설종은 억지로 마음을 추스르고 친구를 위해 하고픈 말을 이어갔다.
 "샘, 있잖아요.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 마음을 고백하는 거, 어떻게 생각해요?"
 "뭐?"
 "아니, 예를 들어 샘이나 제가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가정하면요, 그걸 고백하는 게 좋을까요, 그냥 가슴 속에 간직하는 게 좋을까요?"
 설종의 뜬금없는 말에 가만히 귀 기울이던 경진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설종의 의도가 뭔지 골똘히 생각하는 눈빛이었다. 그를 조용히 응시하던 설종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한 마디 했다.
 "그냥, 한 번 생각해 보시라고요. 가끔은 용기라는 게 필요할 때도 있더라고요. 저 그만 올라가 볼게요."
 설종이 그렇게 사라진 뒤에도 경진은 그 자리에 한참이나 앉아 있었다. 이윽고 천천히 식당을 나오던 그의 뇌리에 번뜩 스치는 생각.
 '쟤가 지금 나 좋아한다는 소릴 돌려서 말한 거야? 그러니까 간접 고백이야?'
 갑자기 그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는 갑자기 주변이 확 더워지는 것을 느끼고는 얼굴에 손부채질을 했다. 그런 말쯤 들었다고 심장이 춤을 추고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이 어쩐지 못마땅해 경진은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의국으로 올라갔다. 삽질은 삽질을 낳고 오해는 오해를 낳는다는 진리를 외면한 그들의 행보는 앞으로도 계속된다, 쭈욱.

 날이 많이 더워졌다. 내일이 초복이라선지 가만히 있어도 등에 땀이 주르르 흘렀다. 병원 안은 냉방 시설이 잘 되어 무척 시원하긴 했지만 늘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하는 노가다 1년차는 더위를 제대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김 샘, 저기 할머니 길에서 기절해서 오셨어요."
 인턴이 가리키는 대로 설종이 다가가자 머리가 하얗게 센 노부인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할머니, 좀 어떠세요?"
 "어지럽네요."
 "제가 좀 봐드릴게요. 똑바로 누우세요."
 설종이 동공과 심전도를 살피며 이런저런 검사를 해 봤지만 별다른 것은 없었다. 더위를 먹어 기력이 허해진 것이라 생각될 뿐이었다. 그런데 저녁 여섯 시쯤 치프가 내려와 그녀를 불렀다.
 "혹시 아까 할머니 한 분 오셨어? 쓰러지신 분."
 "네. 저기에."
 설종이 가리킨 쪽에 간 치프는 노부인에게 말을 걸며 다시 세심히 진찰을 했다. 한참 치료를 하던 그가 스테이션으로 오더니 설종을 불렀다.
 "저 할머니 권 교수님 어머니셔. VIP니까, 신경 써."
 그제야 왜 치프까지 호출이 되었는지 이해한 설종이 의미심장하게 할머니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 이상은 없었지?"
 "네. 더위 먹으신 것 같더라고요."
 "그런 것 같더군."
 스테이션에 앉아 설종이 내민 차트에 기록을 하던 치프가 문득 설종을 보았다.
 "이젠 심전도 좀 알겠나?"
 그러자 쑥스러운 표정으로 설종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네.예전보다 훨씬 낫네요. 아직은 부족하지만."
 "많이 읽고, 분석해. 그러다 보면 나중엔 저절로 보여."
 "네.알겠습니다."
 설종이 대답하자 차트 기록을 마친 경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밤 김 선생이 응급실 당직이야?"
 "네."
 "그래. 수고해. 말한 대로 할머니 잘 살피고 어지러우신 것 나아지면 병실로 옮겨드려."
 "네."
 치프가 사라진 뒤에 다시 환자를 보던 설종은 응급실 간호사가 슬그머니 다가와서 그녀를 살짝 부르자 의아한 표정으로 처치실로 들어갔다. 그러다 그 안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와, 이게 다 뭐예요?"
 "내과 치프 선생님이 시켜 주셨어요. 응급실에서 나눠 먹으라고."
 "세상에........"
 언젠가 설종에게 사준 적이 있던 초밥과 새우튀김, 장어덮밥에 도미 회까지. 배달된 요리를 하나하나 살피던 설종의 두 눈이 놀라움에서 금세 탐욕으로 변했다.
 "젓가락 어디있어요, 젓가락!"
 설종이 울부짖자 간호사가 여유롭게 나무젓가락을 내밀며 안심시켰다.
 "여기요. 천천히 드세요. 아무도 안 뺏어가요."
 "말 시키지 말아요. 뭐부터 먹지? 아!회!"
 제일 좋아하는 회부터 간장에 찍어 입 안에 넣자 쫄깃하게 씹히는 질감에 설종의 뺨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어떡해...........너무 맛있어."
 눈물을 글썽이며 하나하나 맛을 보는데 무심결에 처치실로 들어오던 항아가 그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이게 뭐하는 짓이야!"
 "회 먹는 지시이야. 빨리 와서 젓가락이나 잡아."
 항아 역시 회와 초밥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건 설종과 마찬가지였기에 두 사람은 행복해 죽겠다는 얼굴로 응급실 식구들과 함께 즐거운 저녁 시간을 마쳤다. 다 먹고 그릇을 치우는 데, 항아가 설종에게 넌지시 물었다.
 "근데 이게 웬 건데? 환자가 사줬니?"
 "아니? 치프가 시켜주더라?"
 "뭐? 우리 내과 치프?"
 "응. 커피 마셔. 자."
 설종이 내민 커피를 후루룩 마시며 가늘게 눈을 뜨고 생각에 잠겼던 항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치프가 좀 이상해. 냄새가 나."
 "그렇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응. 치프가 다른 속셈이 있는 게 분명해. 아무래도 치프가 좋아하는 사람이 이 안에 있어."
 설종이 여태 의심해 왔던 사실을 항아가 꺼내자 그녀도 맞장구 치기 시작했다.
 "반,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응?"
 "물론이지. 나의 날카로운 육감이 말해 주건데, 그 사람은 바로............"
 "바로............"
 "너!"



 "너!"
 둘이 동시에 삿대질을 하며 서로를 가리킨 두 사람은 황당한 얼굴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항아가 자신을 가리키자 설종은 먹던 커피를 내려놓고 침까지 튀겨가며 흥분했다.
 "뭔 소리야, 반! 치프는 너 좋아해. 틀림없다고. 육감 좋아하시네. 아예 육갑을 떨어라, 이년아!"
 "말도 안 되는 소리.너야, 너. 김설종이라고."
 "웃기지 마."
 "뭐가 웃긴데? 치프는 너 좋아한다니까?"
 반이 단호하게 내뱉자 설종은 입술을 쑥 내밀며 이상하단 표정으로 친구를 보았다.
 "뭘 보고 그런 생각이 들디?"
 "밸런타인데이 때 초밥 사준 것도 그렇고, 너 쓰러졌을 때 사색이 되어서 업고 가던 것도 그렇고, 사다리 탈 때 네가 삼만 원 걸렸다고 징징대니까 얼른 수표 내 줬잖아. 오늘만 해도 너 응급실 당직이라고 이런 거 시켜 주고. 안그래?"
 반이 하나하나 꼽으며 주지시키자 점점 설종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너, 너하고 같이 먹으라고 시켜 준 거겠지."
 "나는 오늘 중환자실 당직인걸? 검사지 가지러 잠시 내려왔다가 운 좋게 얻어먹은 거고."
 그렇게 듣고 보니까 또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회색빛 안개에 싸인 것처럼 음흉하기만 한 게토레이의 속마음을 누가 짐작하랴.
 "반! 너 그럼 며칠 전에 거시기 했다는 그 넘이 치프 아녔어?"
 설종이 진지하게 묻자 잠시 어리둥절하던 반은 푸하하 웃어버렸다.
 "얘는! 매일 마주봐야 하는 의국 사람하고 어떻게 그래! 그 사람은 병원 사람도 아니고, 벌써 끝났어."
 항아가 딱 잘라 아니라고 말하자 설종은 그간 자신이 오버했던 일이 생각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버렸다. 그간의 일은 아무리 친한 반이라도 죽을 때까지 묻어두리라 결심한 그녀였다. 그렇게 항아가 푹 찌르고 간 뒤, 설종은 그날 저녁 내내 마음속으로 고민을 하게 되었다.
 '진짜일까? 아니겠지. 그 인간이 날 좋아할 리가.............그래도 진짜면? 진짜로 나 좋아하는 거면?'
 갑자기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쿵쿵쿵. 이상하게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나오고 막 더워진 설종은 달아오른 자기 얼굴을 손부채로 세게 휘저어 식였다. 괜한 소리를 지껄여 마음을 들뜨게 한 항아에게 원망이 갔다.
 "아따! 징한 년. 허벌나게 씨부리더만 가슴까지 벌렁벌렁 한당께!"
 새벽에 환자가 거의 업자 당직실에서 잠시 눈을 붙이려던 설종은 잠이 드는 마지막 순간에 경진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어떤 색깔이다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마블링처럼 신비로운 그의 눈.
 "눈동자가............정말 예뻤어."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그녀는 죽은 듯 잠에 빠졌다.

 설종가 항아가 그런 결론을 내린 것이 무색하게도, 다음 날 아침 회진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의국에서 치프에게 엄청나게 깨지고 있었다. 미비차트가 많아 의무기록실에서 연락이 온 때문이었다.
 "몇 번을 얘기했어! 차트 미루지 말라고."
 "죄송합니다."
 "네 그 죄송하단 말도 이젠 지겹다. 대체 언제쯤 정신을 차릴래? 저번에도 말이야........"
 날이라도 잡았는지 작정하고 계속되는 그의 잔소리를 들으며 설종은 맘속으로 항아를 열심히 씹고 있었다.
 '이년아, 이 지랄이 좋아하는 것이면 사랑이라도 했다간 살인나겠다. 내가 미친년이지. 그런 걸 친구라고 두고 하는 말에 귀 기울이고 앉았으니.'
 "그런 태도로 의사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면......."
 고개를 푹 숙인 채 치프가 하는 말을 듣고 있던 설종은 가급적 딴 생각을 하도록 노력했다. 다 듣고 있기는 너무 지겹고 짜증이 났다.
 '새꺄! 너는 씨월씨월 씨부리라. 난 딴 생각을 할 텐게.'
 그러면서 땅을 쳐다보는데, 옆 탁자에 앉은 3년차의 발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평소 무좀이 심했던 그 선배는 다섯 발가락 양말을 신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뿐이면 어떻게든 참아 보겠는데 그 선배가 책을 보면서도 자꾸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다섯 개의 발가락이 따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자니 어쩐지 웃음이 나와 견딜 수가 없었다.
 '우,웃겨! 참을 수가 없어. 하지만 웃으면..........저 인간이 날 죽이려 달려들 건데.'
 설종은 필사적으로 참았지만 저절로 벌어지는 입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일부러 앞니로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그 아픔에 웃음은 조금은 잦아들었다. 다행이었다. 그러나 이제 선배는 발가락으로 피아노를 치는 것처럼 리드미컬하고 버라이어티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안 보려 해도 안 볼 수가 없었다. 마약에 중독이라도 된 것처럼 저절로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크큭, 핫, 코, 콧김이 새어 나와! 웃음이 새고 있어, 안 돼!'
 "크으흐읍!"
 거친 호흡이 확 새어 나오자 설종은 얼른 손을 들어 입과 코를 막으며 어금니를 물었다. 눈이 저절로 웃는 모양이 되자 그녀는 일부러 얼굴을 세게 찡그렸다. 그녀가 눈을 꼭 감고 입을 막은 채 울상을 지으며 몸을 부들부들 떨자 그때까지 야단을 치던 경진이 순간 말을 멈추고 설종의 얼굴을 살폈다.
 ".......너, 우냐?"
 걱정스러움이 깃든 어투로 그가 물었지만 설종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입을 가린 손을 떼면 미친년처럼 그대로 웃어젖힐 것 같았다.
 '울고 싶다, 짜샤! 너무 웃긴데 못 웃는 심정을 너는 아느냐?'
 설종은 입을 막은 채 강하게 고개를 흔들었지만 의국 내의 레지턴트들은 그녀가 갑자기 흐느끼기 시작했을 때부터 모두 두 사람이 하는 양을 몰래 주시하고 있었다. 말없는 시선들이 그를 흘겨보며, 애를 울리다니 좀 심한 것 아니냐는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해왔다. 멋쩍어진 경진이 헛기침을 하며 턱짓을 했다.
 "됐어. 그만 나가 봐."
 천만다행으로 웃던 것을 들키지 않은 그녀는 그대로 고개를 푹 숙이고 인사하고는 의국을 빠져나왔다. 벌게진 얼굴로 의국복도를 미친 듯이 뛰어가는데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동욱을 보았지만 설종은 인사도 못하고 그대로 지나쳤다. 되는대로 비상구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간 그녀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맘껏 웃기 시작했다.
 "오, 예! 살다보니 이런 스킬도 통하는구나! 아하하하! 아하하하하!"
 아무도 없는 비상구에서 설종은 참았던 웃음을 마구 터뜨렸다. 이런 식이면 인생도 참 살만 했다. 한참 웃고 나니 쌓였던 스트레스가 확 풀어졌다. 설종이 가벼운 마음으로 비상구 문을 다시 열고 나가려 하는데 누군가 그 문으로 쑥 들어왔다. 설종은 뒷걸음질 치며 그 사람이 누군지 살폈다. 그게 놀랍게도 준우인 것을 알고 설종은 얼른 인사를 했다.
 "어머,안녕하세요! 박준우 선생님."
 "아, 김 선생. 오랜만이야."
 "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응, 나야 그렇지 뭐."
 설종은 그의 표정을 가만히 응시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오늘따라 더 환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간 계속 벼르던,가장 궁금하던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저.....선 보셨던 거, 잘돼 가세요?"
 그러자 준우의 뺨이 확 붉어지더니 입가의 미소가 진해졌다.
 "그걸 아직 기억하네? 하하. 그게, 보름 뒤에 약혼식 치르게 됐어."
 쿵.
 설종의 입매에 경련이 일었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직접 들으니 그렇게 큰 충역일 수가 없었다. 그녀의 심장이 박자를 놓치고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애써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축하드려요. 정말."
 "고맙다. 김 선생."
 "청첩장 보내 주시면 축의금 많이 넣을게요."
 "하하. 뭘 그런데 신경을 써! 아무튼 고마워."
 그렇게 그는 계단으로 사라졌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빠져 서 있을 수가 없었던 설종은 벽에 몸을 털썩 기댔다. 이젠 정말 모든 미련을 접어야 할 때가 온 것이었다.
 '혼자서 좋아해도 괜찮다면 그러고 싶었는데.'
 깨닫지 못한 사이 주르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생각보다 그를 많이 좋아했던 모양이었다. 고백도 제대로 못해보고 끝난 짝사랑이 너무나 비참하게 느껴져 설종은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흐으흑! 바보 같이, 흑. 훌쩍!"
 벽으로 얼굴을 돌린 채 흐르는 콧물과 눈물을 닦으며 어깨를 들썩일 때, 비상구 문이 살짝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놀라서 얼른 눈물을 훔친 그녀는 그 사람이 그냥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벽에 머리를 묻고 바짝 붙어있었다. 그런데 천천히 다가온 그 사람은 설종의 어깨에 묵직한 손을 얹었다.
 설종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니 치프 경진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녀의 눈동자와 빨갛게 부어 버린 코끝을 보던 그가 작게 한숨을 삼켰다. 뭐라 또 야간을 칠 줄 알았던 설종은, 생각밖에 그가 자신의 어깨를 살짝 끌어당겨 제 품에 기대게 해 주자 어쩔 줄 몰라 했다.
 '이 인간이 돌았나?'
 불안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설종은 몸을 뒤로 확 빼며 그에게 안기지 않으려 반항했다. 그러자 낮고 부드러운 저음으로 그가 중얼거렸다.
 "내가 좀 심했나 보다. 그만 울어."
 그러자 설종은, 아까 그가 했던 꾸중으로 자신이 운 것이라 경진이 착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본의 아니게 그를 속인 꼴이 되어버린 설종은 어쩐지 묘한 죄책감이 들어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렇다고 지금 치프에게, 사실대로 다 풀어냈다간 그대로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기에 함부로 입을 놀릴 수도 없었다.
 그렇게 죄책감과 당황스러움에 머뭇거리는 사이 결국 경진의 힘센 팔이 이끄는 대로 주춤주춤 끌려간 설종은 그의 품에 가만히 안겼다. 그의 긴 팔이 설종의 어깨를 감싸 안은 순간, 항아가 했던 말이 그녀의 머리에 떠올랐다.

 '치프는 널 좋아해.'

 '정말일까? 정말 이 사람이 나를.....'
 의구심이 가득한 설종의 몸은 바짝 긴장하여 딱딱하게 굳어있었지만 어깨에 와 닿은 그의 팔은 무척이나 부드럽고 또 다정했다. 그가 말없이 자신을 위로하려 한다는 것을 깨닫자 그녀의 긴장도 차차 풀어졌다.
 양간 마른 편이었지만 경진의 가슴은 의외로 굉장히 넓고 단단했다.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있으려니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가슴 속에 뜨겁게 끓어오르던 덩어리들이 스르르 녹는 느낌이랄까. 아까 준우의 말로 인해 받았던 마음의 충격까지 치유되는 착각이 일었다. 설종은 서서히 마음을 놓고 경진의 품에 푹 안겨 가늘게 어깨를 떨며 작게 흐느끼고 있었다.
 "흑!"
 소리죽여 울먹이는 그녀의 떨림이 가슴으로 전해질 때마다 경진의 마음도 따라 울렁거렸다. 설종이 울상이 되어 의국을 뛰쳐나간 것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터였는데, 이어 들어온 동욱이 그녀가 울며 비상구로 뛰어갔다는 말을 했을 때는 사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최소한 의국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경진의 표정만큼은 태연하기 짝이 없었지만, 마음은 온통 비상구에서 울고 있을 그녀에게 가 있었다.
 하던 일을 마무리해놓고 다른 곳에 가는 척 조용히 의국을 나왔지만 비상구로 걸어가는 그의 발걸음은 급하기만 했다. 결국 이곳에서 흐느끼고 있는 설종을 발견하자 자기도 모르게 안아버린 것이었다. 작은 키의 그녀가 훨씬 큰 그에게 안기자 품 안에 쏙 들어왔다. 상상해왔던 것보더 더 가녀리고 나긋한 몸이었다.
 그의 시선에 설종의 하얀 목덜미가 들어왔다. 언젠가 그의 손끈으로 만져본 적이 있던 곳이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 말랑하던 그 살결. 그 기억을 떠올리자 경진의 손가락 끝이 따끔따끔 저려왔다. 다시금 만져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거기에 뜨거운 입술을 대고 혀로 핥아 맛볼 수만 있다면. 그런 상상을 하자마자 피가 뜨겁게 데워졌다. 목 안이 뻣뻣이 말라갔다.
 그가 그토록 강한 욕구와 싸우고 있을 때, 어느 정도 진정이 된 설종이 고개를 들며 경진의 가슴을 두 손바닥으로 살짝 밀었다. 그렇게 그는 밀려나고 말았다. 설종은 그와 시선을 부딪치지 않고 꾸벅 인사를 한 뒤 비상구 문을 열고 나갔다. 그녀가 사라진 뒤에도 경진은 한참이나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루 온종일 바빴다. 설종은 치토스의 결혼 소식으로 약간 우울하긴 했지만 그런 마음을 떨치려 일부러 일에 집중하니 나중에는 할 일이 없어 한가함을 느끼기도 했다. 저녁 회진을 마치고 나니 오늘 밤은 당직이 없는 오프였다. 밀린 잠이나 잘까 하고 터벅터벅 걷는데 뒤에서 권 교수가 그녀를 불렀다.
 "김 선생!"
 "네, 교수님."
 "어제 응급실에서 우리 어머니 봐준 거 고마웠어. 김 선생이 친절히 잘해 주더라며 어머니께서 무척 좋아하시더라고."
 "그러셨어요? 별로 해드린 것도 없는데."
 설종은 멋쩍음에 배시시 웃었다. 나이가 지긋하신데다 성품이 원만한 권 교수를 설종은 무척 존경하고 있었다.
 "오늘 저녁 혹시 오프야?"
 "네."
 "그럼 김 선생 수고하는데 내가 밥이나 사지."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오늘 복날이기도 하고, 이런 때 잘 먹어둬야 여름 잘 나지. 옷 갈아입고 현관으로 나와."
 권 교수가 그녀의 어깨를 툭 치며 권했다. 우울해서 별로 외출하고 싶지 않았지만 끝까지 사양하기는 어려운 분이라 어쩔 수 없었다. 가운을 벗어두고 가벼운 화장을 한 뒤 외출복으로 갈아입는데 오늘 당직인 항아가 밥을 먹고 올라왔다.
 "쫑, 외출해?"
 "어."
 "맛있는 거 먹고 와! 힘 좀 내고."
 아까 점심시간에 준우의 약혼 소식에 대해 말해 주어선지 항아가 위로의 말을 던졌다. 설종은 피식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고 숙소를 나섰다. 그녀가 현관으로 내려가는데, 멀리서 권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는 치프가 보였다. 순간 설종의 가슴이 뜨끔했다. 아침에 비상구에서 그에게 안겼던 일이 생각이 났기 때문이었다.
 '미치겠네. 왜 바보같이 거기서 울고 있어가지고.'
 설종은 스스로를 원망하며 권 교수에게 쭈뼛쭈뼛 다가갔다. 그녀를 본 권 교수는 빨리 오라는 손짓을 하더니 뒤돌아 택시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그의 뒤를 설종과 치프가 따라갔다.
 '같이 가는 거야? 치프랑?'
 설종이 놀라는데 이미 택시 앞문을 열고 타던 권 교수가 재촉했다.
 "뭐하나, 두 사람 빨리 와!"
 경진이 성큼성큼 걸어가 택시를 타자 설종도 침을 꿀꺽 삼키고 그의 옆자리에 올랐다. 식당으로 가는 길, 교수와 치프는 어떤 환자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설종의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지 않으려 해도 자꾸 옆자리의 경진이 의식이 되어서였다. 그의 굵고 낮은 저음이 택시 안을 울릴 때마다 설종의 가슴도 따라 설렜다.
 아까 비상구에서 다정하게 그녀를 안아주던 그의 손길과 가슴의 촉감이 자꾸만 되살아났다. 그의 가슴에서 맡았던 은은한 스킨향이 택시 안을 떠돌다 희미하게 그녀의 코끝에 전해지자 아랫배가 찌르르 떨려왔다. 설종은 잡생각을 쫓으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저 인간에게 정욕을 물씬 느끼다니! 인생 막장이로고!'
 식당에 도착하자 권 교수가 앞장서서 들어갔다.
 "이 집이 서울에서 제일 맛있는 집이야. 어서 들어와."
 문패도 없고 간판도 없는, 약간은 낡은 집인데 서울에서 제일 맛있다니. 의아함에 설종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대놓고 물을 수도 없는 은사님이라 그녀는 쫄래쫄래 두 사람을 따라 들어갔다.
 메뉴판도 없고 가격도 없었지만 대충 권 교수가 알아서 탕과 수육을 시켰다. 어딘가 재미있어 보이는 권 교수의 눈빛을 보고 그때쯤 눈치를 챘어야 하는데 설종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곧 나온 수육을 먹으면서도 고기가 무척 쫄깃하고 맛있다고 느꼈을 뿐, 별다른 생각을 못했다. 얼큰한 탕까지 다 먹고 기분 좋게 식당을 나왔을 때, 권 교수가 두 사람은 어디로 갈 거냐고 물었다.
 "저는 병원에요."
 설종이 대답하자 경진도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병원에 잠시 가 봐야 합니다."
 "그래? 그럼 나 먼저 집으로 가지 자네가 김 선생과 함께 병원으로 가면 되겠구먼. 자, 김 선생. 나한테 얻어먹었다고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말아요. 우리끼리 비밀로 하자고."
 그렇게 권 교수가 먼저 택시를 타고 사라지자 두 사람만 남았다. 어쩐지 어색한 기분이 들어 설종이 그의 눈치를 보는데 문득 경진이 그녀에게 물었다.
 "오늘 뭐 먹은 건지 알아?"
 "네?"
 설종이 두 눈을 깜빡거리자 경진이 갑자기 피식 웃었다. 입매를 보기 좋게 올리며 씨익 웃는 그 얼굴에서 이상하게 눈을 뗄 수 없던 설종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신탕."
 "네에?"
 "권 교수님 낙이야. 1년차 선생들 감쪽같이 속이고 먹이는 거. 속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지. 반 선생한테는 말하지 마. 중복 때 아마 데리고 가실 거야."
 "하, 어떻게....."
 설종은 제 입을 손바닥으로 꾹 막으며 경악했다. 아직까지 그녀의 위 속에서 꿈틀거릴 고깃덩이를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말을 잇지 못하는 설종을 흘끔 넘겨다 본 경진이 옆에 있는 카페를 턱으로 가리켰다.
 "차나 한 잔 마시러 가지."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뚜벅뚜벅 걸어갔지만 설종은 여전히 제 입을 꼭 막고 있는 상태였다. 손을 떼면 그대로 토할 것 같았다.

 "정말 권 교수님 그렇게 안 봤는데. 이중인격 아니에요?"
 차가운 아이스커피를 벌컥벌컥 마시더니 설종이 억울한 듯 내뱉었다. 경진은 가타부타 대꾸가 없었다. 설종은 울상이 된 얼굴을 두손으로 가렸다.
 "정말 미안해. 난 너희들 먹을 생각 없었어."
 설종의 울먹이는 소리를 듣고 경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어지간히 충격적인 모양이었다.
 "치프 샘은 알고 있었죠, 그치요?"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설종이 눈을 하얗게 뜨며 경진을 쏘아보았다.
 "그럼 눈치라도 좀 주시던가!"
 "뭐 하러."
 "네?"
 "알았으면 피차 피곤했을 거야. 먹고 싶지 않아도 먹어야 했을테니."
 하긴, 은사님이 사주는 음식인데, 싫다고 대놓고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의 말대로 만약 설종이 그 사실을 알았더라도 울며 겨자 먹기로 먹는 척이라도 해야 했을 것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모르고 맛있게 먹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설종의 어깨가 축 처졌다.
 "사회생활 참 힘드네요."
 "이 정도 가지고 뭘. 어쨌든 맛있는 음식 사주려 하신 거잖아. 좋게 생각해."
 "좋은 게 좋은 거다.......어렵네요."
 설종이 어쨌든 수궁하자 경진이 슬그머니 입매를 끌어올렸다.
 "반 선생한테는 귀뜸해줄 거야?"
 ".....걱정 마세요. 걔는 엄청 좋아해요. 몸 약하다고 어릴 때부터 철마다 집에서 먹였대요."
 의외의 사실에 경진의 눈이 약간 커지더니 웃음이 진해졌다. 설종은 겸연쩍어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다.
 "항아라도 교수님 물 먹였으면 좋겠네요. 진짜 미워."
 "맛은 어땠어?"
 그가 한 손으로 턱을 괴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카페의 조명에 비치는 그의 눈동자가 오묘한 빛을 발했다. 설종은 눈을 깜빡이며 그것을 바라보다 헛기침을 했다.
 "괜찮았어요. 그냥 육개장이었다고 생각할래요. 근데, 샘."
 "왜?"
 성종은 침을 꿀꺽 삼키고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가 조심히 말을 꺼냈다. 화내면 어쩌지.
 ".....안경 한 번 벗어 보시면 안 돼요?"
 "뭐?"
 경진의 몸이 살짝 뒤로 젖혀졌다. 그녀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설종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할 말을 골랐다.
 "저기, 눈동자 색깔이 좀 특이해서......정말 예뻐요.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자세히 보고 싶어요."
 경진은 이마를 살짝 찌푸린 채로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설종이 가슴에 손을 모으고 애원까지 했으나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싫어."
 경진이 그녀를 외면한 채로 차갑게 대답하자 설종은 괜한 소리를 해 그를 화나게 만들었나 싶어 후회했다. 그가 계산서를 들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설종도 그를 따라 풀이 죽은 모습으로 일어섰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걱정이 무색하게, 앞서 가는 경진은 뺨이 살짝 붉어진 것이, 화가 난 것이라기보다는 쑥스러워 어쩔 줄 몰라하는 바로 그것이었다.
 찻집을 나와 큰길가로 걸어가는데 설조의 가방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얼른 액정을 꺼내 확인하니 집이었다. 설종의 얼굴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는데 계속 울리는 벨소리를 듣고 치프가 의아한 눈빛을 했다. 할 수 없이 몸을 돌리며 조금 떨어져 폴더를 열었다.
 "네."
 [여보시오.아가! 쫑이냐?]
 "잉. 엄니가 웬일이셔잉?"
 [아가, 느가 느무 보고 싶간디, 시방 뭐땀시 전화를 안 허는 것이여?]
 "허이고, 엄니는. 나도 보고 싶지럴. 근디 나가 월매나 바쁘간디. 집구석일랑 무탈하시고잉?"
 구수하게 펼쳐지는 사투리에 저절로 경진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정감 있고 부드럽게 이어지는 그녀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푸근하게 들렸다.
 "시방 선이라고라? 아, 결혼은 또 뭣허게!"
 순간 경진의 고개가 살짝 들리며 턱 끝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저절로 통화내용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아가, 이번에도 도망가믄 느그 오빠더러 쫓아가서 잡아오라 헐텐게, 느는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야.]
 "흐미, 결혼 생각이 아직 없다고 그렇게 말했간디, 나가 엄니땀시 살 수가 없당께! 암튼 끊소잉."
 설종이 잔뜩 찡그린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몸을 돌려 치프를 보니 그는 긴 손을 뻗어 택시를 잡고 있었다. 그렇게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오는 내내 그는 말이 없었고 덕분에 그녀는 무척이나 어색한 시간을 참아내야 했다.

 오프를 받고 외출을 했던 항아는 갑작스레 내린 소나기에 발이 묶여 가게 처마 밑에 서 있었다. 병원이 저 멀리 언덕 위에 보였지만 이 비를 다 맞고 갈 순 없었다. 세찬 빗줄기만 잦아들면 뛰어가리라 생각하고 지루하게 기다렸다. 건너편 커피숍이라도 가서 시간을 죽일까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반 선생?"
 놀란 그녀가 고개를 들어보니, 동욱이 우산을 삐딱하게 든 채로 항아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어머, 샘."
 "누구 기다려?"
 "아니오. 비가 많이 와서, 먼저 가세요. 좀 있다 갈게요."
 "같이 쓸래?"
 동욱이 우산을 세우며 그녀에게 물었다. 시알리스 항아는 조금 머뭇거리다 사양을 했다.
 "괜찮아요."
 "일행 없으면 같이 가. 이리 와."
 그가 다가와 우산을 씌워주자, 그녀는 못 이기는 척 동욱의 옆으로 갔다. 비 내리는 거리를 그와 함께 천천히 걷는데, 바닥을 맞고 튀어 오른 빗줄기가 그녀의 바지자락을 적셨다. 그러자 동욱이 그녀쪽으로 조금 더 우산을 넘겼다. 항아가 미안한 듯 우산대를 밀었다.
 "샘, 그쪽 어깨 다 젖어요. 같이 써요."
 동욱의 왼쪽 어깨는 이미 푹 젖어 있었다. 그러나 동욱은 피식 웃으며 한 손으로 항아의 머리르 부비부비 쓰다듬었다.
 "반 선생, 순진하구나. 이럴 때는 그런 말보다 팔짱을 끼면서 좀 더 가까이 들어오는 게 늑대에 대한 예의야."
 "네에? 아하하하하."
 항아는 그의 바람대로 팔짱을 끼지는 않았지만 동욱에게 바짝 붙어 걸었다. 덕분에 아까보다는 조금 덜 비를 맞게 된 두 사람은 마치 다정한 연인들처럼 사이좋게 한 우산을 쓰고 병원으로 이어진 언덕길을 올라갔다. 둥근 우산 아래 마주한 두 사람의 어깨가 뭐라 서로 속살거려는 듯 붙였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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