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September 25, 2019

그녀의 정신세계 #6 (단합대회)

"내과 단합대회 일정입니다."
 3년차가 내민 용지를 받아 검토하는 경진의 얼굴은 늘 그렇듯이 고요했다. 휴가철에는 환자도 약간 뜸했기 때문에 교수들이 여름 휴가를 떠났을 때 레지던트끼리 단합대회라는 명목으로 2박 3일간 여행을 떠나곤 했다. 해마다 있어왔던 전통이라 그도 주르륵 훑어보고 사인을 해 주려 했다. 그런데 맨 마지막에 쓰인 당직란에 그의 눈길이 갔다.
 금, 토요일 당직- 김설종, 반항아.
 토, 일요일 당직- 김진우, 이영식.
 "1년차들에게 당직 맡기려고?"
 "네, 그렇습니다만."
 3년차의 대답에 치프의 표정이 못마땅함으로 살짝 굳었다. 턱을 매만지던 그는 사인을 해 주지 않고 그대로 용지를 내밀었다.
 "2년차들로 바꿔."
 "하지만 작년에도 1년차가....."
 "교수님들도 휴가가신 마당에 1년차들끼리 둬서 사고라도 터지면 누가 책임질 거야?"
 경진이 짜증스레 대답하자 3년차는 어쩔 수 없이 서류를 받아들고 의국을 나갔다.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그의 귀를 괴롭히는 목소리가 있었으니.
 "그래. 가진 무기가 치프, 달랑 그거 하난데, 맘껏 휘둘러라."
 경진이 불쾌한 표정으로 동욱을 돌아보았지만, 의자에 기대 볼펜을 빙글빙글 돌려가며 저널을 읽던 그는 태연히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왜 째려 봐? 잘했다고 칭찬한 거야."
 뭐라 할 듯 경진의 입술이 달싹거렸지만 그뿐이었다. 동욱과 말싸움을 시작하면 무조건 자신에게 불리했다. 동욱은 화술의 달인이었고 경진은 침묵의 달인이었다. 동욱이 화려한 말솜씨로 그를 제압하면 경진은 무조건 무시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두 사람 사이의 싸움은 늘 그렇게 막상막하였다. 어색한 분위기를 견디다 못한 경진이 벌떡 일어나 의국을 나가자 혼자 남은 동욱은 아까부터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던 저널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자식이, 떠밀어 줘도 못 먹네. 콩알만 한 거 하나 못 꼬셔서 아주 똥줄이 타는 구나."
 설종에게 대시해도 괜찮으냐는 공격까지 해가면서 억지로 밀어붙여 줬건만 둘 사이는 여전히 지지부진했다. 그래도 경진이 설종을 대하는 태도가 요즘 훨씬 나아진 것을 느끼며 약간은 안도하는 동욱이었으나 어딘가 '초큼' 부족했다. 마음에 안 들었다.
 "단합대회라........."
 좋은 구실이 생겼는데 어떻게 둘을 붙여줄까 하는 것이 미션 임파서블이었다. 좋아도 미적댈 줄밖에 모르는 경진이 시간이 갈수록 쪼다로 보였다. 친절히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여태껏 제 마음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거라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자신이 또 설쳐야 하나.
 '귀찮은데 그냥 둘이 합방시키고 문이나 잠가버릴까?'
 어쩌면 그것도 썩 괜찮은 방법일지도 몰랐다. 끌리는 남녀가 밀폐된 공간 안에 있으면 무슨 일이 생겨도 생기는 법이니. 이런 저런 생각에 빠졌던 동욱은 머리를 털고 다시 저널을 들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다.
 잠시 설종의 맑은 눈동자가 그의 마음을 스쳐갔다. 밝고 다정한 아이였다. 그 아이가 특유의 친화력과 따스함으로 경진을 다시 웃게 해 준다면, 그 무섭던 겨울에서 빠져나오게 해 준다면 자신은 무엇이든 내어놓을 수 있었다. 과거의 어두운 기억이 떠오르자 그의 손에 꽉 쥐어진 볼펜이 부러질 듯 세게 굽어졌다.

 "웬일이니, 웬일이니! 정말 우리 1년차도 놀러 가는 거야?"
 "치프 샘이 그랬다잖아. 2년차 당직 박으라고! 아싸!"
 단합대회 공문이 붙자마자 내과가 술렁였다. 원래 해마다 1년차가 당직을 섰는데, 올해는 2년차에게로 넘어가자 덕분에 2년 연속 단합대회 당직을 서게 된 2년차들의 표정이 살벌했다. 맘 같아선 좋아서 펄쩍펄쩍 뛰고 싶었던 1년차들이지만 2년차 앞에서 눈치를 보나라 일부러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나중에 당직실에 1년차들만 남았을 때야 박수를 치고 흥분하기 시작했다.
 "어디로 간대?"
 "강원도 영월. 내과 단합대회는 해마다 럭셔리하기로 유명하대. 교수님 찬조에 의국비 남은 것까지 몽땅 쏟아 붓는댄다."
 "동강 래프팅도 한다니, 아, 잠이 안 올 것 같아!"
 "작년에는 밤에 나이트까지 갔댄다. 간만에 발바닥 때 좀 벗겨야지. 크크크."
 다들 그렇게 기대감에 들떠 단합대회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단합대회.
 금요일 오후 병원 앞에 대기한 관광버스를 타고 영월까지 가는 길, 일행은 여행에 대한 기대로 모두들 한껏 들뜨고 즐거운 기분이었다. 반과 함께 앞쪽에 앉은 설종은 음료수와 간식 상자를 들고 버스에 탄 의국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역시 어딜 가서나 각종 서빙과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은 1년차였다.
 "쫑, 너 여기 앉아라."
 맨 뒷자리에 혼자 널찍하게 앉아있던 동욱이 제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턱 짚으며 설종을 불렀다. 그녀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는데, 동욱이 통로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역시 혼자 앉은 경진이 그런 두 사람을 슬쩍 일별했다.
 "샘, 제 자리는 앞쪽인데....."
 "오늘부터 2박 3일간은 오빠라 불러라. 쫑."
 "네? 아하하!"
 "자, 어서 앉아. 우리 함께 오누이의 오붓한 정을 나눠보자."
 동욱의 느끼한 요구에 환하게 웃으며 설종은 그의 옆에 덥석 앉았다. 진짜 오빠처럼 편안하고 다정한 동욱이 요즘 들어 굉장히 친근하게 느껴지는 그녀였다.
 "어떻게 정을 나누실 건데요?"
 동욱의 옆에 앉은 설종이 눈웃음을 가득 담고 물었다.
 "먼저 호칭부터 시작이다. 불러봐, 동욱이 오빠아."
 "하하하, 뭐예요! 너무 느끼하고 기름져요!"
 "어허, 오빠한테 느끼하다니! 자, 다시. 오빠, 동욱이 오빠아. 여기서 부드럽게 콧소리를 넣는 게 관건이야."
 "아하하하하! 큭큭큭!"
 옆자리에서 연방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는 경진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창밖의 광경에 집중하며 듣지 않으려 해도 모든 신경이 그녀의 웃음소리에 가있었다. 그의 이마가 점점 찌푸려졌다. 커다랗게 웃던 설종이 동욱의 목소리를 흉내 내면 그를 불렀다.
 "오빠, 동욱이 오빠아! 이럼 됐어요?"
 "음, 내 이름은 그만하면 됐고, 다음은 이거다. 경진이 오빠!"
 그러자 그때까지 해맑게 웃던 설종의 표정이 금세 흐려졌다. 그녀가 주춤거리자 둥욱이 재촉했다.
 "뭐해? 어서 해봐. 오빠의 친구도 오빠다."
 "에이, 샘! 장난도."
 옆자리에서 턱에 손을 괸 채 창밖만 뚫어져라 보는 치프의 눈치를 슬쩍 살핀 설종이 난처하게 중얼거렸다. 이상하게 같은 4년차인데도 왜 경진의 이름은 편하게 부를 수 없는 건지 이유를 딱 꼬집어 말하긴 힘들었지만 아무튼 설종은 주저하고 있었다.
 "그래. 다 웃자고 하는 장난이지. 그러니 편하게 불러. 어서 경진이 오빠도 불러 줘, 안 그럼 재 삐쳐. 노래방에선 오빠들, 이러면서 잘도 부드더니만."
 동욱이 자꾸 재촉하자 망설이던 설종의 입술이, 첫 소리 '겨'를 발음하듯 살짝 벌어졌다. 동욱뿐만 아니라 돌아앉은 경진까지도 사실 그녀가 정말로 오빠라 불러 줄지 궁금해 그쪽으로 바짝 귀를 기울인 채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런데 저 앞쪽에서 항아가 설종을 불렀다.
 "쫑! 음료수 다 돌렸니?"
 "어, 갈게! 샘 , 잠깐만요."
 다행이다 싶어 설종은 얼른 일어나 앞으로 가버렸다. 그녀가 저 앞으로 사라진 뒤에야 창을 보던 경진이 몸을 반대로 돌리고는 잡아먹을 듯 동욱을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한 대 칠 것 같은 살벌한 표정이었다. 멋쩍게 그 시선을 받아내던 동욱이 어깨를 으쓱했다.
 "장난이잖아. 재미있으라고 한 건데."
 그 말에 경진이 더욱 사나운 얼굴로 노려보자 동욱은 그만 고개를 창으로 돌려 피하고 말았다. 뺨에 와 닿는 따끔따끔한 시선을 느낀 동욱이 겸연쩍게 중얼거렸다.
 "없음 말고. 근데 왜 그리 째려 보냐고."

 단합대회의 숙소로 정해진 곳은 동간 인근의 펜션이었다. 다락이 있는 이 층 통나무집 펜션은 한눈에 보기에도 전원의 향기를 물씬 풍기는 정취 있는 곳이었다. 1,3, 4년차 총 12명이 일행이었는데, 여자는 항아와 설종뿐이라 두 사람에게는 특별히 제일 꼭대기의 작은 다락방을 내어주고 나머지 남자들은 아래층 큰 방 2개에 5명씩 나눠 묵기로 했다.
 "각자 방에 짐 풀고 5시까지 계곡으로 집합."
 시간 약속이 정해지자 항아와 설종은 가파르고 좁은 계단을 타고 오르며 자신들의 방을 찾아갔다.
 "얘, 여기 올라갈 때 조심해야겠다."
 "그러게. 떨어지면 장난 아니겠다. 즉사하는거 아냐?"
 "의사들이 수십 명인데 설마 죽기야 하겠니? 쿡쿡."
 농을 나누며 차례로 계단을 오른 두 사람은 다락방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신 천장이 낮고 좁은 것을 알고 걱정스런 표정이 되었다.
 "쫑, 넌 설 수 있니? 난 못 설 거 같아."
 "이년아! 내 키가 작다고 너까지 괄시하냐? 여기서는 10살짜리 애도 제대로 못 서겠다."
 그나마 지붕의 대들보인 중간 부분은 좀 높았으나 가장자리로 갈수록 시옷자 형태로 낮아지는 천장은 주의하지 않으면 이마를 찧을 것 같았다. 그러나 2년차 선배들이 오지 않아 여자라곤 항아와 설종뿐이었기에 방을 바꿔달라고 불평할 수도 없었다.
 "겨우 두 밤인데 뭐. 꾹 참고 자자. 낮에는 아래층에서 놀면 되지, 뭐."
 "그래. 그러자."
 엉금엉금 기어 다니며 짐을 대충 정리한 두 사람은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녀들이 펜션 현관으로 나가자 3년차 선배들 4명이 기다렸다는 듯 두 사람을 에워쌌다.
 "왜, 왜 이러세요?"
 "아니, 그냥. 같이 가자고."
 항아와 설종 뒤에 건장한 남자들이 두 명씩 호위하듯 붙어 서서 둘에게 계속 걸어가라고 턱짓을 했다. 어쩐지 묘한 느낌이 들었으나 섬배가 가라는 데야 어쩔 수 있나, 둘은 터덜터덜 계곡으로 걸었다.
 저 멀리 보이는 계곡에서는 이미 물놀이가 한창이었다. 진우와 영식은 완전히 쫄딱 젖은 채로 서로를 향해 미친 듯 물을 튀기며 뿌려대고 있었고 다른 4년차들은 그들을 구경하면서 낄낄거리고 있었다. 순간 위험신호가 감지된 설종이 그 자리에 우뚝 섰다. 항아에게 재빨리 눈짓을 한 설종은 순식간에 옆길로 도망갔다.
 "제길, 튄다!"
 "저, 저! 눈치 챘구나, 레비트라 빨리 잡아."
 "왜 그러는 ..........어?"
 무슨 소린지 전혀 감을 못 잡았던 항아는 어 , 어, 하는 사이에 순식간에 선배들에게 팔다리를 잡혀 계곡물에 수평 이동되었다.
 "아아악! 살려 주세요! 샘들, 이러시면 안 돼요."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항아가 온몸을 비틀며 비명을 질렀지만 이미 흥분하여 눈동자에 광기가 흐르는 사내들의 완력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반항하냐? 반항아. 긴장을 풀어. 오빠가 살살 할게."
 "아악! 싫어, 이러지 마아아, 꺄아아아악!"
 풍덩!
 수심 1미터도 안 되는 얕은 물이지만 뼛속까지 으스스하게 느껴질만큼 차가웠다. 얼른 일어났지만 이미 온몸은 완전히 젖어버렸다.
 "아 , 몰라요! 진짜 너무해!"
 항아가 물을 털며 소리를 지르자, 푹 젖은 진우와 영식이 달려들어 그녀를 물귀신처럼 잡아끌었다. 비명을 지르는 것도 개의치 않고 마구 물을 먹이는데 저기서 또 다른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멧돼지처럼 사지가 대롱대롱 매달려 요동을 치는 설종이었다. 어찌나 빨리 도망을 쳤는지 가파른 산중턱까지 뛰어올라가서야 겨우 잡아온 그녀였다. 그녀를 들고 오는 3년차들의 이마와 등이 온통 땀벅벅이었다.
 "아 씨! 놔요, 빨랑! 가만 안 둘 거야! 복수할 거야! 진짜라구우!"
 "넌 조그만 게 어떻게 그렇게 잘 달리냐? 어휴, 더워 죽겠네. 자, 시원하게 해주마!"
 풍덩!
 항아와 똑같은 운명이 된 설종은 입과 코로 물이 쏟아져 들어오자 소름이 끼쳐 죽도록 발버둥을 쳤다. 순순히 잡힌 항아와는 다르게 이 더운데 힘들게 뛰어다니도록 고생을 시켰던 그녀가 얄미웠던 3년차 선배들이 일어나려는 설종의 머리를 틈을 주지 않고 다시 물에 처박았다.
 "어푸! 어푸! 숨을, 못 쉬겠, 꼬르륵!"
 "걱정 마. 여기 심폐소생술이랑 응급구조해 줄 사람 널렸어."
 "좀 더 깊이 넣어줘라. 우리 김 선생 섭할라."
 3년차 네 명에 동기인 진우 영식까지 가세해 설종을 마구 물에 집어넣었다. 아까부터 물 밖에서 그 광경을 웃으며 지켜보던 4년차들이 그 사이 물가로 달아나는 항아를 가리키며 말했다.
 "야, 반항아 도망간다. 뭐하나?"
 "예,예. 지금 만나러 갑니다. 그리운 항아 씨!"
 그렇게 항아는 몇 발 도망치지도 못하고 다시 붙잡혀 물속에서 뒹굴었다. 다른 4년차와 마찬가지로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재미있게 그들을 보던 동욱은, 문득 따그닥 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경진의 손아귀에서 빈 맥주 캔이 무참히 찌그러지고 있었다.
 경진은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듯 이마를 살짝 찌푸리고 있었는데, 그의 시선은 곧장 물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잇는 설종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동욱의 입매가 씨익 늘어졌다. 속이 탈만도 했다. 대놓고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두고 보자니 미칠것이고.
 "쯧쯧, 저러다 오늘 애 잡겠네."
 동욱이 태연하게 말하며 넌지시 경진을 긁어댔지만 그는 그 말에 더 세게 이마를 찌푸릴 뿐 그래도 움직이지는 않았다. 동욱은 속으로 살짝 감탄했다.
 '어쭈, 일단 참아 본다, 이거지? 자식, 넌 자존심 때문에 망할 거다.'
 손아귀의 캔을 완전히 찌그러뜨릴 만큼 초조해 하면서도 끝까지 참던 경진은, 그러나 다음 순간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던 설종이 도망치려 일어섰을 때 뒤에서 진우가 그녀의 허리와 가슴을 양팔로 확 껴안으며 끌어당기고는 함께 데굴데굴 뒹굴자 튕기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기세에 놀란 동욱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를 보았다.
 '얘가 웬일로 흥분을 다 하네.'
 "이제 그만 해라. 애들 감기 들겠다."
 그가 약간 화난 듯 고함치자 머쓱해진 남자들이 그제야 슬그머니 설종과 항아를 놓아주었다. 겨우 자유로워진 몸으로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어 밖으로 기어 나온 두 사람은 세게 기침을 하며 온몸의 물을 털었다.
 "콜록, 콜록!"
 "덜덜덜, 어, 추워!"
 설종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기침을 하자 그녀의 새파래진 입술을 흘끗 본 경진이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수건을 쓱 내밀었다.
 "닦아."
 언제 준비했는지 경진이 내주는 수건을 얼른 받은 설종은 그것으로 대충 얼굴만 닦은 뒤 항아에게 건넸다. 벌벌 떠는 두 사람을 보고 치프가 낮게 말했다.
 "들어가서 옷 갈아입고 나와."
 물을 뚝뚝 흘리면서 숙소로 사라지는 두 사람을 보며 동욱이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렇군! 다른 건 다 참아도 엉뚱한 놈이 손대는 건 못 참는다........이건가?"
 뭔가 심오한 깨달음을 얻은 노인처럼 그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만족했다.
 한여름인데도 숙소로 걸어가는 설종과 항아는 한기에 벌벌 떨고 있었다. 푹 젖은 신발에 흙이 마구 달라붙었다. 축축한 티셔츠를 배꼽에서 한껏 비틀어 짜며 항아가 잘 벌어지지도 않는 입을 열고는 서글프게 속삭였다.
 "괜히 온 것 같지?"
 "내가 미친년이지! 젠장, 잠이나 잘 걸. 뭐가 좋다고 따라 와서는......."
 "쫑, 이대로 참을 거야?"
 "돌았냐? 오늘 밤에 다 죽었어. 두고 봐."
 설종의 눈빛에 날이 섰다. 뿌드득 이를 가는 그녀의 얼굴에는 살기가 철철 흘렀다.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뽀송뽀송한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두 사람은 훨씬 기분이 나아졌다. 밖으로 나오자 어느새 어둑어둑 해진 계곡에 풀벌레 우는 소리가 가득했다. 남자들은 펜션 앞에 만들어진 간이 나무 식탁에 앉아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어, 반 선생, 김 선생. 이쪽으로 와! 밥 먹자."
 아까 물 먹인 일이 약간 미안했는지 선배들이 벌써 바비큐 준비를 다 해놓고 상을 차리고 있었다. 항아와 설종은 골이 잔뜩 난 얼굴로 터벅터벅 그쪽으로 다가갔다.
 평소에는 머리를 항상 똘똘 말아 틀어 올렸던 설종은 이 날 샤워를 하고 말리면서 자연스레 길게 늘어뜨린 상태였다. 저녁 바람에 살랑살랑 나부끼는 설종의 결 좋은 머리칼에 경진의 시선이 잠시 머물렀지만, 그는 못 본 척 고개를 돌려버리고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멧돼지 고기가 야들야들하게 익었다. 어서 먹어 봐. 자 아앙!"
 진우가 갖은 아양을 떨며 들이댔지만 그 정도로 화가 풀릴 리 없는 두 사람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을 하고 외면하기만 했다. 그때 옆의 화덕에서 고기를 굽던 경진이 설종과 항아 앞에 접시를 하나 쓱 내밀었다.
 "자."
 그것은 잘 익은 고기와 김치 구운 것이 수북이 담긴 접시였다. 설종이 돌아보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경진은 그녀를 외면하고 고기를 계속 굽고 있었다. 설종의 꼭 다문 입매가 약간 위로 늘어지는 듯했으나 다음 순간 그녀는 여전히 뾰로통한 얼굴로 되돌아갔다.
 "식는다, 빨리 먹어."
 안 보는 줄 알았더니 낮고도 잔잔한 목소리로 그가 덧붙였다.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리고 발가락 끝이 오므려지는 기분이었다. 그때 동욱이 다른 접시와 젓가락을 몇 개 들고 와서 두 사람 옆에 떡하니 앉았다.
 "그러게 말이야, 내가 애 잡겠다고 그렇게 말렸는데 다들 말을 안 듣더라고. 자. 따뜻할 때 먹어. 어서."
 동욱이 달랬지만 설종이 하얗게 독이 오른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샘도 똑같아요. 말로만 오빠 동생이지, 나 정말 죽는 줄 알았다고요."
 "오냐, 그래. 다들 잘 들어! 앞으로 우리 쫑이 괴롭히면 나한테 죽는다, 알았나?"
 동욱이 다 들리도록 크게 엄포를 놓자 모두들 크게 대답했다.
 "넷!명심하겠습니다."
 "들었지? 자, 젓가락."
 그러면서 동욱이 젓가락을 설종의 손에 쥐어주자 마주 앉은 항아가 볼이 퉁퉁 부어서 못마땅하게 말했다.
 "샘, 너무 차별하신다."
 그 말에 동욱이 눈가를 동그랗게 말며 항아에게도 젓가락을 건넸다.
 "오, 항아 섭섭했나 보구나? 걱정마라. 여동생의 친구도 여동생, 우리 쫑이랑 항아는 오빠가 접수한다."
 동욱의 너스레에 치 소리를 내며 입술이 삐죽거리던 항아도 못 이기는 척 젓가락을 잡고 고기를 집었다. 한참 물에서 허우적댔더니 허기가 장난이 아닌데다 고기가 정말 맛이 있어서 두 사람은 허겁지겁 음식을 먹어 치웠다.
 식사를 마치고 난 뒤 펜션 안으로 들어간 일행은 술판을 벌였다. 한참 그 자리에서 웃고 떠들던 설종은 어느 정도 취기가 돌자 머리를 식히러 밖으로 나왔다. 온통 담배 연기가 가득한 방 안에 있닥 맑은 공기를 마시니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었다. 저 멀리 아까 놀던 계곡에서 작은 모닥불이 피워 진 것을 본 설종은 그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모닥불 앞에 앉은 남자가 동욱인 것을 확인한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샘!"
 설종이 그를 부르자 모닥불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동욱이 고개를 들고 그녀를 보았다.
 "인마, 오빠라니까."
 "헤헤. 뭐 하세요?"
 "도 닦는다."
 "무슨 도요?"
 "불가에 앉았으니 불도를 닦아야겠지?"
 어쩐지 말이 되는 소리에 설종은 쿡쿡 웃으며 엉덩이를 땅에 대고 편하게 앉았다. 밤하늘의 별이 총총 빛나는게 도시와는 사뭇 달랐다. 설종은 작게 헛기침을 했다.
 "저, 샘. 궁금한 거 있는데요."
 "뭔데?"

 "치프 샘 말인데요, 혹시 눈동자 색이 좀 특이한 거 아세요?"
 그 말에 동욱이 가만히 고개를 돌려 설종을 물끄러미 보았다. 쌍꺼풀 없이 큰 동욱의 눈동자가 어쩐지 아련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래. 나도 처음엔 그것 때문에 경진이가 혼혈인 줄 알았어. 그런데 아니래. 어머니쪽 집안 내력이라더라. 조상 중에 외국인이 있지 않았나, 그런 생각까지 해 봤대."
 "너무 신기하지 않아요? 진짜 예쁘더라."
 "그래, 예쁘지.....그래도 그런 말하지 마. 눈 색깔에 관심가지는 거 굉장히 쑥스러워해. 별로 눈도 안 나쁘면서 뿔테 안경 쓰는 것도 그 때문이야."
 설종의 입이 후회로 살짝 벌어졌다.
 '벌써 해버렸다고요! 안 그래도 싫다고 했는데.'
 "나도 너한테 궁금한 게 있는데."
 동욱이 말문을 열자 설종이 모닥불을 뚫어지게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떻게 하면 골 때리게 사랑스러울 수가 있냐? 비법이 정말 궁금하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문장이라서 잠시 두 눈을 깜빡이던 설종은 금세 벌게진 얼굴이 되었다. 잊힌 형님의 향기가 다시 바람을 타고 감도는 듯했다.
 "이런 씨, 반이 가르쳐줬죠, 그렇죠?"
 "아니. 너 몰랐니? 그 형님 편지 내가 코팅해서 소장하는 거. 언젠가 경진이한테도 보여줄 생각이다."
 "네에?"
 설종이 경악했지만 동욱은 태연했다.
 "상당히 빼어난 필력이라 나도 사실 감탄했다. 아, 궁금한 거 또 있다. 어떻게 하면 삭카린보다 달콤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지........"
 "에이 좀, 그만 하세요! 치프 샘한테는 절대 보여 주면 안 돼요, 알았죠?"
 설종이 그의 어깨를 때리며 소리를 지르자 동욱이 크게 하하하 웃었다.
 "그래서 그 형님은 어떻게 됐어?"
 "한 번 찾아왔는데, 진우가 따돌려 줬어요. 지금은 퇴원했어요. 아무튼 안 보여 주기로 약속하는 거죠?"
 "글쎄다, 네가 하는 거 봐서."
 "어우, 뭐예요. 진짜."
 여름밤은 깊어가고 코끝을 간질이는 달콤한 나무 타는 냄새가 정겨웠다. 그때 뒤에서 들리는 낮고 굵은 목소리.
 "여기서 뭐해?"
 웃던 동욱이 고개를 돌아보고는 그것이 경진인 것을 알고 손짓을 했다.
 "어, 앉아라. 지금 김 선생이랑 심오한 인생 상담을 하는 중이다."
 묘한 시선으로 동욱과 설종을 번갈아 보던 경진이 다가와 모닥불 앞에 털썩 앉았다. 자신과 마주 보는 자리에 경진이 앉자 여태 편안히 긴장을 풀고 맘껏 웃던 설종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그가 나타났을 때부터 가슴 속이 쿵쿵거리고 떨리더니 이제는 손끝까지 저려왔다.
 '돌겠네. 왜 이리 심장이 제멋대로 벌떡벌떡 하는 것이여?'
 딱히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경진이 있는 쪽으로는 제대로 쳐다보기가 힘이 들었다. 예전엔 무섭거나 싫어서 피해다녔지만 지금은 그것과 어딘가 조금 다른 이유로 그를 외면하고 싶었다. 그녀가 깨닫지 못한 사이, 언제부턴가 경진을 보게 되면 심장이 콩닥거리기도 하고 아랫배가 싸하게 긴장이 되었다.
 경진은 경진대로 자신이 오기 전에는 활발하게 떠들고 웃던 설종이 갑자기 역력히 싫은 얼굴을 하자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세 사람은 잠시 그렇게 말없이 타는 모닥불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화장실 좀."
 동욱이 부스스 일어나더니 펜션으로 걸어갔다. 졸지에 둘만 남은 형국이 되자 설종의 입술이 타들어갔다. 경진은 여전히 한 마디 말도 없었고, 어색함을 견디기 어려웠던 설종은 차라리 적다한 핑계를 대어 숙소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 중이었다. 그에게 뭐라 둘러대야 하나 망설이던 그녀가 눈을 슬그머니 들었다.
 타는 모닥불 빛을 받아 그의 얼굴 윤곽이 주홍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반듯한 이마와 쭉 뻗은 콧날, 인중이 또렷하고 모양이 좋은 입술까지 차차 내려오면서도 설종은 차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처음 발견하는 경진의 준수한 아름다움에 그녀는 몰래 감탄하고 있었다. 이토록 빛이 나는데 어째서 여태 찾아내지 못했는지 스스로 이해가 되지 않을 만큼 빼어났다.
 그때 경진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그녀의 시선을 마주했다. 불꽃이 넘실대는 가운데 그들의 눈이 얽혔다. 그는 설종의 동그란 눈매와 새카만 눈동자, 곧은 코와 붉고 촉촉한 입술을 천천히 음미하듯 보았다. 누가 그러란 적도 없는데 움직이면 안 될 것처럼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주변의 공기가 흐름을 멈추었다. 모닥불의 온기가 닿는 경계까지만 유효한 마법처럼 두 사람은 세상과 분리된 또 다른 세계에 와 있었다. 그것은 아주 찰나였을 수도 있었고 어쩌면 깨닫지 못했으나 긴 시간이었을지도 몰랐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는 무서운 의국의 선배가 아니었고 그녀는 사고뭉치 후배가 아니었다. 바로 남자와 여자의 이름으로 만나는 순간이었다.
 키스하고 싶다.
 그녀의 살짝 벌어진 도톰한 입술을 보며 그는 그런 생각을 했다. 작고 여린 몸을 한 손으로 휘감아 자신에게 바짝 붙이고는 말랑하고 매끈한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싶었다. 겹겹의 옷 아래 숨은 가슴은 이 손아귀에 넣고 미친 듯이 주무르고 싶었다. 달빛 아래 하얀 도자기처럼 빛나는 저 얼굴이 쾌감으로 일그러지는 모습을 두 눈에 똑똑히 새기고 싶었다. 그때 저 입술 사이로 자신의 이름이 새어 나온다면......
 "가자."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숙소로 몸을 틀었다. 자신의 일그러진 욕구를 그녀에게 한 자락 끝이라도 내보일 수는 없었다. 몇 발짝 뒤에서 따라오는 설종이 부스럭부스럭 자갈을 밟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성큼 걷자 그 소리는 조금 멀어졌고 보폭을 줄이자 다시 커졌다. 그녀와의 마음의 거리도 물리적 거리처럼 뜻하는 대로 조절할 수는 없는걸까.
 "쫑, 빨리 와!"
 "어."
 불을 환하게 밝힌 펜션 앞에서 항아가 손을 흔들었다. 설종이 그를 스쳐 앞으로 뛰어갔다. 뛰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왠지 여태 알던 설종이 아닌 것처럼 낯선 경진이었다.

 그날 밤, 새벽 한 시까지 계속되었던 술판은 내일의 일정을 위해 겨우 정리되었다. 두 시가 조금 넘어가자 얼큰하게 달아오른 취기와 피곤함으로 완전히 곯아떨어진 동료들의 코고는 소리가 방안을 조용히 울렸다. 몸은 피로했지만 어쩐지 잠을 이루지 못한 경진은 묘한 상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잠을 능히 이겨낼 만큼 달콤한 설렘이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억눌린 듯한 작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그는 그 속삭임이 자꾸 반복되자 눈을 떠 어두운 방안을 살폈다. 굳게 닫힌 다락으로 통하는 문 저편에서 나는 소리였다. 분명 항아와 설종이 자고 있을 터인데 무슨 일일까.
 ".....했어?"
 "그래.....는데,...........니까. 열어."
 안에서 철컥 소리를 내며 빗장을 푼 두 사람이 방으로 내려오자 경진은 지금 저 애들이 뭐하는 건가 새삼 궁금해졌다. 그래서 넌지시 두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두 사람은 엉금엉금 기어 하필 자신이 누운 곁에 오더니 서로 속삭이며 대화를 했다.
 "맨 끝에 진 샘, 그 옆에 진우랑 영식이, 그리고 동욱 샘과 게토레이."
 설종의 속삭임이 들리자 그는 조금 의아했다. 게토레이라니. 자신을 부르는 말인 것 같은데 어째서 그렇게 부르는 걸까.
 "누구부터 할래?"
 "저쪽 끝에서부터 하자. 진 샘부터 . 내가 진 샘하고, 반 네가 진우를 해."
 "알았어."
 다시 어둠 속에서 기어간 두 사람은 진 선생과 진우 곁으로 가 뭔가를 부스럭거렸다. 가늘게 실눈을 뜬 경진이 몰래 살펴보니 저희들끼리 소리 죽여 낮게 낄낄거리며 얼굴에 낙서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경진은 저도 모르게 씩 웃어버렸다. 낮에 물에 빠진 복수를 이렇게 하는가 싶어 어쩐지 귀여운 생각이 들었다.
 키득거리며 열심히 낙서를 그리던 설종은 자던 남자가 얼굴을 긁으며 몸을 뒤척이자 얼른 옆에 척 누웠다.



 "쉿!"
 건너편의 항아도 설종을 따라 구부정한 모습으로 엎드렸다가 남자들이 계속 자는 것을 확인하고는 부스스 일어나 둘이 같이 킥킥 웃어댔다. 그 모습을 보니 그도 따라 자꾸 웃음이 나려 해 입술을 깨물고 겨우 참았다.
 마침내 자신의 차례가 다가오자 경진은 어쩌나 고민을 했다. 눈을 뜨고 놀래 줄 건인지, 그냥 고스란히 당해 줄 것인지. 그와 동욱의 머리맡에 앉은 두 사람도 나름의 고민이 있는지 심각한 토론을 거치는 중이었다.
 "그나마 치프 샘이 말려서 그만둔 거잖아. 봐 주자."
 항아가 말했다. 역시 생각이 있는 녀석이었다. 그는 몰래 흐뭇해했다. 그럼 설종은 어떨까. 마구 기대가 되었다.
 "야, 내가 여태 게토레이한테 당한 게 있는데. 그냥 두면 섭하지."
 그 말에 경진은 울컥 화가 치솟으면서 무지하게 섭섭함을 느꼈다. 좋아한다더니, 이건 항아보다 못했다. 그러면서도 또다시 나온 게토레이란 말에 역시나 자신의 별명이 맞구나 여긴 경진이었다.
 "안 돼. 후환이 두려워. 4년차는 건드리지 말자."
 "알았다. 그럼 이제 옆방에 가자."
 "잠깐. 나 화장실 갔다 올게."
 항아가 엉금엉금 기어 화장실에 간 사이 설종은 경진의 옆에 쭈구리고 앉아 있었다. 달빛에 어른거리는 그의 얼굴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겁 많은 항아의 저지에 참기로 하긴 했지만 어쩐지 그냥 두기는 아쉬웠다. 그녀가 슬그머니 그에게 다가가 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경진이 안경을 벗은 얼굴은 처음이었다. 이참에 한번 똑바로 보고 싶었다.
 '콧대가 수월찮이 높당께.'
 잠든 그의 얼굴이 조각처럼 단정했다. 느긋이 다문 입술을 가만히 보자지 괜스레 탐이 났다. 설종의 손가락이 서서히 움직이더니 그의 콧등과 입술 근처를 배회했다. 그러다 다시 손가락을 오므리고 물러섰다.
 '나가 지금 미친 것이 아닌가 모르겠네.'
 이해할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의 입술을 만져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항아가 나오기 전에 얼른 끝내야 한다는 초조함에 마음이 급해졌다.
 '딱 한 번만, 한 번만 만져보자. 흐미, 떨리는 거.'
 달달 떨리는 손가락 끝으로 그의 입술까지 억지로 가져갔지만 쉽게 용기가 나질 않았다. 닿을 듯 말 듯 애를 태우던 그녀의 손가락이 살포시 경진의 입술에 내려앉았다. 먼저 검지가 닿고 , 다음 그 옆에 중지가 닿았다. 부드럽고 말랑한, 그리고 생각보다 뜨거운 입술이었다.
 한 번 만지니 욕심이 났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입술을 살그머니 쓸었다. 우뚝 솟은 콧날을 비단처럼 훑어 내려와 폭 가라앉은 인중을 지나 도톰하게 튀어나온 그의 윗입술에 이르렀다. 말랑한 입술 끝을 검지로 살짝 누르자 용수철처럼 탄력있게 튕겨 나왔다. 촉촉한 입술이었는데도 손가락 끝이 화상을 입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뱃속까지 뜨끈하게 익는 느낌이었다. 잠든 그의 숨결이 손가락 끝을 따스하게 휘감았다.
 그때 욕실에서 물 내리는 소리가 나자 설종은 퍼뜩 손을 치우고 몸을 뒤로 뺐다. 항아가 나오는 것을 보고 엉거주춤 일어난 설종은 그녀와 함께 문을 열고 옆방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사라진 뒤, 문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번쩍 눈을 뜬 경진은 문이 있는 쪽을 홱 노려보았다. 달밤이라 그의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들키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천둥소리보다 더 크게 쿵쾅대는 심장 소리를 그녀가 알아챌까 조마조마해 미칠 것 같았다.
 경진은 가만히 손가락을 들어 그녀가 쓸고 간 입술에 대었다. 그토록 떨리던 감촉이 마치 꿈처럼 아득했다. 얼굴이 간질간질하고 가슴이 화끈거리는 이 기분. 지독하게 달콤하고 온 몸이 그래도 붕 뜨는 듯한 착각을 주던 그 순간.
 경진은 불편한 몸을 돌려 옆으로 돌아누웠다. 이미 묵직하게 달아오른 몸을 가라앉히려면 오늘 밤을 꼬박 새워도 부족할 것 같았다. 그는 자꾸만 위로 늘어지는 입매를 억지로 다잡고 잠을 이루려 안간힘을 썼다. 그렇게 밤이 깊어갔다.

 아침이 되었을 때, 펜션 곳곳에서 난리가 났다. 남의 얼굴을 보고 웃다가 자기 얼굴에도 똑같이 뭔가가 그려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광분한 사내들이 즉각 범인 색출에 들어간 것이었다. 기나긴 30초간의 조사 끝에 결국 그들은 용의자를 찾아냈다.
 "반항아, 김설종! 죽을래?"
 3년차가 위협했지만 설종은 끄덕도 안했다. 오히려 새끼손가락으로 귀지를 파서 후 부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아, 누가 그러게 비인간적으로 물고문을 하래요? 그래도 샘은 예쁘게 됐네. 뺨에 큐피트 하트 문신."
 "어우, 진짜! 유성매직으로 그려서 지워지지도 않게 해 놓고."
 세수를 하고 나온 진우가 그녀를 죽일 듯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어찌나 문질렀는지 진우의 코끝이 빨갰다. 진우의 테마는 루돌프였다. 루돌프 검은 코. 여기저기서 장미꽃 테마와 조폭 칼자국 테마, 혹은 안경 테마들이 곳곳에서 나타나 송곳니를 드러내며 항아와 설종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자신의 미술적 재능을 살아 숨 쉬는 아름다운 캔버스에 맘껏 펼친 두 사람은 회심의 작품을 만날 때마다 좋아서 자지러지며 쌓였던 스트레스를 마구 풀었다. 그렇게 엎치락뒤치락 아침을 대충 챙겨 먹고 일행은 래프팅을 위해 동강으로 내려갔다.
 "아우, 경치 끝내 주네."
 "옥빛 물만 봐도 저절로 시원하다, 얘."
 동강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계곡 양쪽으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줄을 이었고 그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쉴 새 없이 불어오고 있었다. 래프팅 하는 곳에 이르자 여섯 명씩 두 개의 조로 나누고 인솔자의 설명을 들었다. 노처럼 생긴 패들을 쥐는 법과 물에 빠질 때 주의해야 할 점 등등을 듣고 구명조끼와 헬멧까지 착용했다.
 맨 앞에 경진과 진 선생이 자리를 잡고 중간에 설종과 진우가 탔다. 그리고 뒤에 3년차 선배 둘이 앉았다. 항아는 동욱과 함께 다른 조였다. 경진의 바로 뒤에 앉은 설종은 그의 넓은 어깨와 긴 등을 새삼스레 흐뭇한 시선으로 보았다.
 '등이 엄청 넓쩍하구마이라. 눕혀서 장기 둬도 쓰것네.'
 "자, 출발! 패들을 저으세요! 하나, 둘, 셋, 넷!"
 맨 뒤에 앉은 인솔자가 이끄는 대로 구령을 세게 외쳐가며 강을 따라 내려갔다. 바위에 부딪혀 하얗게 부서지는 거품과 얼굴을 차갑게 식히는 물보라에 더위가 확 식었다. 점점 속도를 빠르게 하여 노를 젓다 급격한 커프길에 들어서자 그만 배가 뒤집히고 말았다.
 "아악!"
 옆자리의 진우와 마구 엉키며 물속에 빠진 설종은 발이 땅에 닿지 않자 겁이 더럭 났다.
 "어떡해, 나 수영 못 하는데."
 구명조끼가 있어서 다행히 뜨긴 하지만 자세가 불안했다. 그녀가 물살에 휩쓸러 가지 않게 노력하며 겨우 바위를 잡고 지탱할 동안 키큰 남자들은 뒤집힌 배를 똑바로 띄웠다.
 "잡아."
 먼저 배에 탄 경진이 선뜻 손을 내밀자 설종이 그의 팔을 잡았다. 설종의 손목을 꽉 움켜쥔 그는 단숨에 그녀를 끌어올렸다. 군살이 하나도 없는 팔이었지만 완력이 대단한 그에게 설종은 속으로 살짝 감탄했다.
 '힘은 쓸 만허구만. 그래도 속단을 하면 안 돼재. 팔뚝 힘과 정력은 상관 없는 것이재. 어디 그짓을 할로 하간디?'
 팔뚝 한번 잡은 것으로 한 남자의 정력까지 속속들이 가늠해 보는 설종의 속마음을 알았다면 아마도 경진은 그녀를 다시 물속으로 밀어 빠뜨려 버렸을 것이다. 그렇게 한 시간 여 래프팅으로 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면서 몇 번이나 일행은 물에 빠졌고 그럴 때마다 경진은 알게 모르게 그녀를 챙겼다.
 '요즘은 너무 잘 해줘서 마음이 안 놓여. 사람이 확 달라져버렸당께.'
 그가 뒤에서 힘껏 밀어주어서 배에 쉽게 올라탄 설종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래프팅이 무사히 끝나자, 인솔자가 패들과 구명조끼, 헬멧을 반납하라고 지시했다. 설종이 구명조끼를 벗었을 때, 경진은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돌리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설종은 베이지색 나시를 입고 있었는데, 물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일단 푹 젖고 나자 옷이 가슴에 온통 달라붙어 상당히 노골적으로 몸의 윤곽이 드러나고 있었다. 얇은 브라를 했는데도 중간에 도톰한 유두까지 비쳐 더할 수 없이 고혹적인 느낌을 주었다. 경진의 얼굴이 확 달아오르며 민망함에 저도 모르게 몸을 돌려버렸다.
 그가 눈치를 살피니 남자들은 말은 하지 않아도 흘끔흘끔 그녀를 훔쳐보고 있었고 설종은 그런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여자는 그녀 하나뿐이었기에 더욱 시선이 갔다. 경진은 미칠 것 같았다. 갑자기 참을 수 없는 화가 솟아올라 억제하기가 힘들었다. 쳐다보는 녀석들의 눈두덩을 모조리 날려버리고 싶었다. 그가 어금니를 꽉 깨물며 화를 누루고 있는데, 그제야 자신의 옷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챈 설종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세상에, 이게 웬 날벼락이야!'
 생각지도 못했건만, 일이 이 지경이 되자 설종은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다. 어제 옷을 다 버려 갈아입을 옷을 가져 오지 못했기에 더욱 난감했다. 설종이 어깨를 구부정하게 구부리며 의식적으로 옷을 앞으로 쭉 늘여 당기고는 엉거주춤 물 밖으로 걸어가는데, 뒤에서 경진이 화난 듯 그녀를 불렀다.
 "김설종."
 그녀가 몸을 돌리니 경진이 미리 챙겨 왔던 제 새 옷을 내밀었다. 그것이 경진이 갈아입을 옷이란 걸 깨달은 설종은 미안함에 덥석 받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자 그의 이마가 더욱 찌푸려졌다.
 "빨리 입어."
 그가 무섭게 노려보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옷을 받아 재빨리 젖은 옷 위로 덮어 입었다. 몸은 계속 축축했지만 노골적인 몸의 곡선을 가리고 나니 그나마 훨씬 나았다. 그러나 갈아입을 옷을 줘버려 젖은 옷을 계속 입고 있어야 할 그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그런데 경진이 자신이 입고 있던 젖은 티셔츠를 머리 위로 올려 벗었다. 갑자기 드러난 그의 맨가슴에 설종의 휘둥그레진 눈이 그대로 꽂혔다.
 '허걱! 저 , 저 가슴 좀 봐!'
 한 번도 본 적 없어서 상상도 못했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하 그의 상체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많이 말랐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판판하고 둥그스름한 가슴 근육과 그 아래 군살 하나 없는 복부의 중앙은 일자로 움푹 들어가 있었다.
 '저것이 말로만 듣던 1등급 육질이지라. 속살이 야들야들할 것이구먼.'
 아름다운 인간의 육체에 대한 순수한 감동으로 설종은 침을 후루룩 들이켜며 정신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경진은 젖은 옷을 척척 접어 빨래처럼 돌돌 말아 꾹 짜서는 최대한 물기를 빼고 다시 입으려 옷을 툭툭 털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와 자신의 시선이 마주치자 설종은 여태 한나도 안 본 척 얼른 눈을 피하고 말았다.
 '흐미, 넋 빠진 년. 뭣을 그리 본다냐.'
 설종은 화끈 달아오른 얼굴을 애써 감추며 태연하려 애썼다. 왠지 뒤통수가 따끔한 것이, 그가 자신을 보고 있을 것만 같아 그쪽은 아예 쳐다보지도 못했다. 래프팅을 마친 항아네 조를 만나 함께 작은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갈 때, 설종의 옆자리에는 동기 진우가 앉았다.
 "어우, 야. 나도 갈아입을 옷 안 가져와서 좀 벗어 짜야겠다. 축축해 미치겠어."
 그러면서 진우도 티셔츠를 홀라당 벗었다. 아무리 친한 동기라도 맨가슴을 드러낸 남자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 가는 것은 조금 거리낌이 있어, 설종은 일부러 고개를 반대로 돌리고 자는 척했다. 그런데 눈치 없는 진우가 계속 말을 걸어왔다.
 "너, 치프 샘 못 봤지. 이야, 몰랐는데 운동 깨나 한 모양이더라, 장난 아니던데?"
 "몰라. 운동을 했는지 말았는지."
 설종이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진우가 흥분하기 시작했다.
 "얘가 뭘 모르네. 운동 안 하고 저절로 그렇게 되는 줄 아냐? 나도 운동이나 좀 할까?"
 "그냥 생긴 대로 살아. 그리고 1년차가 운동할 시간이 어디 있냐?"
 "그래? 야, 쫑! 너도 이 오빠 몸이 이만하면 쓸 만하다고 생각하냐? 응? 객관적으로 좀 평가해 봐라."
 그 말에 고개를 돌린 그녀가 진우의 몸 상태를 눈으로 쓱 훑었다. 그리고 가차 없이 판단을 내렸다.
 "쟈가장 쟝쟝 쟝쟝쟝!"
 "뭐?"
 "네 갈비뼈로 기타 치는 소리다."
 "이, 씨!"
 진우가 입을 다물고 확 노려보았지만 설종은 태연히 눈을 감았다. 다비드의 조각처럼 완벽한 육질을 대하고서 한껏 수준이 높아진 그녀의 눈은 허접한 갈비뼈 따위를 취급하기를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난 뒤 다들 노래방에 가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저녁 때 곁들인 반주로 다들 얼큰하게 취한 터라 노래방에 들어서자마자 분위기가 달아올라 순식간에 광란의 도가니로 변하고 말았다.
 "사랑하고 사랑하는 하나뿐인 내사람아!"
 립스틱을 진하게 칠하고 가발까지 쓴 영식이 진우와 얼싸 안으며 너훈아의 내 사람을 열창했다. 여자 역을 자처한 영식의 애절한 눈빛과 진우의 과감한 애정표현이 의국원들의 심금을 울렸다.
 "쟤네들 사실혼 관계라며?"
  동욱이 장난스레 묻자 그 말이 너무 웃겼던 설종이 배를 잡고 쓰러졌다. 웬만한 동거녀보다 더 다정해 보이는 진우와 영식이니 그런 소릴 들을 만도 했다. 설종은 한참 웃다 문득 얼굴에 와 닿는 눈길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들의 맞은편에 경진이 앉아있었는데, 그는 순간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피해 버렸다. 그 모습에 설종의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쫑, 너두 한 곡 불러!"
 옆 자리의 항아가 떠밀어주자 설종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애창곡 밤이면 밤마다를 불렀다. 댄스를 곁들인 파워풀한 가창력으로 그녀가 노래를 부르자 방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후끈 달아올랐다. 마지막은 마이크를 천장까지 던졌다 받는 것으로 마무리하자 다들 휙휙 휘파람을 불며 박수를 쳐댔다.
 제 노래를 마친 설종이 자리에 앉아 다음은 동욱이었다. 그가 부드러운 중저음의 미성으로 김동률의 기억의 습작을 부르자 설종은 음악에 맞추어 몸을 흔들고 고개를 끄덕여가며 작게 따라 불렀다. 기본적인 목소리가 좋은데다 정확한 음정으로 짚어주니 듣기 좋을 수밖에 없었다. 옆자리의 항아와 감탄스런 눈빛을 나누며 설종은 흥겨움에 들떴다.
 그가 자리로 돌아오고, 화면에 다음곡이 떴는데 부를 사람이 일어나지 않자, 다들 누가 선곡을 했나 싶어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구석진 곳에 앉아있던 경진이 앞으로 슥 나왔다.
 "와우, 경진이 노래 부를 거야?"
 "박 치프, 대체 이게 웬일이야? 이야, 살다보니 이런 날이 다 오고. 야! 다들 조용히 앉아. 우리 경진이 노래 좀 듣게."
 4년차들이 기대에 넘치는 눈으로 몸을 세우자 설종은 옆자리 동욱에게 살짝 물었다.
 "4년차 샘들, 왜 저리 흥분해요? 치프 샘 노래 잘하세요?"
 "들어 봐."
 그 한 마디뿐이었다. 설종은 잔뜩 궁금한 얼굴로 앞에 선 경진을 바라보았다. 키가 훤칠하니 큰 그가 앞에 서니 모니터 가까이 앉은 그녀의 목이 저절로 꺾였다. 그가 선택한 노래는 송창식의 '푸르른 날'이었다. 설종이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노래인데, 그가 어떻게 부를지 솔직히 무척이나 기대가 되었다.
 마이크를 잡은 경진의 얼굴은 취기로 약간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평소의 칼날 같은 긴장감이 조금은 사라진 얼굴이라 표정이 훨씬 풍부하고 느긋해 보여 어쩐지 보기가 좋았다. 늘 저런 얼굴이라면 좋을 텐데, 하는 엉뚱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전주가 나오자 마이크를 입 가까이 가져온 그가 눈을 지그시 감고 첫 소절을 불렀다.
 순간,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쏟아져 들어오는 착각이 들었다. 성량이 굉장히 풍부하면서도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낮고도 감미로운 경진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자 가슴이 미칠 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귀밑에 찌르르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감동한 설종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한다.'는 가사가 든 바로 그 소절을 부르는 순간, 천천히 떠진 그의 눈동자가 그녀에게 머물렀다는 건 설종만의 착각일까? 희미한 조명을 받아 경진의 이목구비가 음영이 뚜렷하게 살아났다. 설종은 그에게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에게서 저절로 풍겨 나오는 숨 막힐 듯 아름다운 남자의 향기가 그녀의 가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의 노래가 클라이맥스에 이르자 그녀는 자신이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슴 속으로 파고드는 것처럼 호소력 있는 목소리에 감성이 마구 자극된 것이었다. 그가 노래를 마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와우,샘! 정말 잘 부르십니다."
 "하얀 그 탑의 김영민보다 백배는 낫습니다."
 경진은 쑥스러운 듯 마이크를 내밀었다. 다음 차례인 항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마이크를 받았는데, 이상하게도 경진은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가까운 항아의 자리, 즉 설종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뜻밖에 그가 옆자리에 앉자 설종의 가슴이 더욱 두근거렸다. 노래에 대한 감동도 아직 가시지 않았는데, 바로 옆에서 그의 체온과 향기를 느끼자 입술 끝이 찌릿 거렸다. 그녀의 시선은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항아에게 향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온통 경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다리를 바꾸며 몸을 고쳐 앉던 그가 자기 허벅지에 있던 손을 옆으로 내리면서 그녀의 손을 턱 덮었다. 자신의 손 위에 뭔가 두툼한 것이 얹혔고, 그것이 경진의 손이란 사실을 깨닫자 설종의 머리가 완전히 텅 비어 버렸다.
 '시방, 이것이 무엇이냐. 게토레이의 손이란 말이더냐.'
 그녀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커다랗고 길쭉한 경진의 손이 조그만 설종의 손을 완전히 덮고 있었다. 설종은 항아의 얼굴만 뚫어지게 보면서,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게 온 신경을 거기에 쓰고 있었다. 그런데 경진 역시 손을 얹은 채 전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기만 해, 설종은 혹시 그가 제 손 밑에 깔린 것이 그녀의 손이란 걸 모르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하게 되었다.
 '모르는 거여. 내 손이 아니라 그냥 다른 물건이라 생각하는 게 틀림없스야.'
 설종은 고민을 거듭하다 천천히 손을 움직여 그의 손아래에서 슬슬 빼내기 시작했다. 조금씩 그녀의 손이 옆으로 빠져나왔지만 경진은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자꾸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제는 손바닥아 나오고 마지막 새끼손가락 마디까지 거의 다 빠져나왔다 싶을 무렵, 경진의 손이 갑자기 그녀의 손을 확 낚아챘다.
 '헉!'
 설종의 심장이 쾅 뛰면서 거칠게 피를 뿜어냈다. 그의 손이 강한 힘으로 설종의 손목을 움켜쥐더니 자기쪽으로 끌어당겼다. 설종의 심장이 억제하지 못할 만큼 빠르게 쿵쿵 뛰고 있었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두 사람은 언뜻 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항아가 노래하는 모습을 계속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 속은 치열한 전쟁중이었다.
 제 쪽으로 설종의 손을 당긴 경진은 다시 의자에 그녀의 손을 깔고 제 손으로 부드럽게 덮었다. 그의 손이 워낙 커서 그녀의 손은 손톱 끝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설종이 망설이고 있는데, 경진의 손가락이 그녀의 손을 힘주어 감싸더니 그의 엄지가 천천히 움직이며 그녀의 살결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설종의 눈동자와 입이 동시에 벌어졌다.
 '미, 미, 미친놈! 이거 서, 성희롱 아냐?'
 술 취한 상사가 노래방에서 옆자리에 앉아 손을 쪼물딱거렸다는 사실은 명백한 성희롱이었다. 거기에 생각이 이르자, 설종은 벌떡 일어나 그의 뺨을 철썩 소리가 나도록 세겨 후려 갈기.........는 상상을 하다 말았다. 그러기엔 그 감각이 솔직히 싫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싫지는 ........않다. 오히려.........괜찮네. 솔직히 말해서, 흐미 좋다. 참말로 기분 좋다. 가슴이 마구 떨리고 다리 사이가 꽉꽉 조여 오는 것이 진짜 끝내주누마. 손 하나만 잡았는디 이로코롬 좋단 말이시?.......근디 나가 시방 즐기고 있는 것이여? 그런 것이여? 말짱한 처녀가, 딴 놈도 아니고 게토레이에게 손모가지를 잽히고도 좋아서 입이 벌어지는 것이여? 말하자면 이건은 강간이 아니고 화간 인것이여? 이런 음탕한 것!'
 설종이 끝 같데 없는 자신만의 4차원 세계에 완전히 빠져 헤매는 동안, 경진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맘껏 그녀의 손을 만지고 있었다. 세게 쥐면 부러질 듯한 그녀의 손목이었다. 가녀리고 나긋한 그녀의 손은 아기처럼 작고 보드라웠다. 처음 그녀의 손을 덮은 것은 우연이었지만, 설종과 살이 닿은 순간 그는 자신이 여태 그것을 너무나 원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조금씩 손을 빼낼 때, 어찌 해야 하나 망설이며 가만히 있었으나 완전히 그녀의 체온이 빠져나간 순간 본능적으로 손이 움직였다. 그녀의 손을 가득 쥐었을 때, 그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단 하나였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노래방에서 숙소로 돌아오며 항아와 설종은 동욱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사람은 경진의 노래가 선사한 감동에서 아직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였다.
 "진짜 놀랐어요. 치프 샘이 그렇게 노래를 잘할 줄은."
 "그러게요, 그렇게 잘 부르면서 왜 그동안 회식 때는 한 번도 안 불렀대요?"
 그러자 동욱이 피식 웃었다.
 "생각보다 굉장히 쑥스러움 타는 성격이거든."
 "그래도 그렇지. 너무 아까워요. 가수해도 되겠던데. 3년차 샘들도 깜짝 놀라는 거 봐서 그동안 의국에서 노래 부르신 지 꽤 오래 되었나 봐요?"
 항아의 질문에 동욱이 머리를 들고 아련한 눈으로 희미하게 웃었다.
 "그 녀석이랑 내가 1년차일 때, 그때만 불렀지. 안 부르면 선배들이 갈구니까."
 의국에서 막내인 1년차는 하늘같은 3,4년차 앞에서 어떻게든 재롱을 피워야 했다. 노래방에서 처참하게 망가지며, 사회생활이 이렇게 더러운 거냐, 이렇게까지 해서 의사 생활을 이어가야 하나 회의를 가지던 1년차들은 시간이 흘러 3,4년차가 되면 그 시절을 개구리처럼 까맣게 잊어버렸다.
 "신기하게도, 그때는 시키는 선배들이 진짜 짜증나고 미웠는데, 지금 너희들 노는 거 보니까 왜 그렇게 귀엽냐?"
 동욱이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리자 항아와 설종은 그를 밉지 않게 쏘아보았다.
 "어우, 뭐예요! 짜증나!"
 "근데, 샘. 1년차 입국식 때 무슨 노래 불렀는데요?"
 설종의 물음에 동욱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때를 회상했다.
 "이효리의 텐 미닛!"
 "네에? 푸하하하!"
 "참고로 경진이가 효리고 나머진 백댄서였다. 안무 연습에 며칠을 매달렸지. 그때는 치프부터 층층시하 진짜 지독했거든. 제대로 안 하면 다 죽일 분위기였어."
 항아와 설종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러면서도 설종은 한편으로 너무 너무 궁금했다. 그가 텐 미닛을 부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돈을 몇 백을 줘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그날 밤, 다락방에 누은 설종은 오지 않는 잠을 부여잡고 이리저리 뒤척이고 있었다. 아까 노래방에서 경진이 손을 잡았던 일을 백번도 더 되새겨 보는 중이었다.
 '진짜 손이 컸어. .........그런데 너무 너무 부드러웠어. 그 손가락.'
 그녀의 손등 위에서 애를 태우며 움직이던 기다란 손가락의 감촉을 생각하자 얼굴이 뜨끈히 달아올랐다. 설종은 그런 자신이 못마땅해 이불을 들어 얼굴에 푹 덮어썼다. 잠시 그 속에 파묻혔던 그녀가 아래로 손을 확 내려 이불을 젖히며 어둠 속에서 눈을 부릅떴다.
 '게토레이가 나를 좋아하는 것이 분명하당께!'
 여태까지는 항아가 아무리 말해도 완전히 믿을수 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 외에는 그의 행동을 설명할 만한 타당한 이유가 없었다. 백 번 양보해서 래프팅 때 물에 빠졌던 자신을 건져 준거나 옷을 벗어준 일들은 치프로서 여자 후배에게 세심하게 배려한 것이라 여긴다고 쳐도, 노래방에서 남몰래 손을 잡고 어루만지는 것은 엄연히 그런 한계를 벗어난 행동이었다. 여태 공부에 치여서 연애감정에 서투른 설종도 그런 것쯤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확실해. 이제야 알겠어.'
 더듬더듬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듯 온갖 종류의 삽질을 일삼았던 설종은 마침내 정확한 진실을 깨닫게 되자 눈앞이 확 밝아지는 기분이었다. 더불어 시작되는 궁금증.
 '언제부터야? 언제부터 날 그렇게 좋아했던 거지?'
 가늠하긴 어렵지만 그렇게 오래된 것 같지는 않았다. 길어야 한두 달이 아닐까.
 '아, 짜식이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이놈의 인기는 진짜 끝이 없다니까!'
 봐주는 사람 하나 없는데 설종은 미친년처럼 어깨를 들썩이며 거드름을 피웠다. 그런데 마구 솟구치는 의아함.
 '근데 혹시 그 인간 사디스트 아냐? 좋아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사람을 갈구지?'
 생각해 보면 늘 치프는 그녀에게 혹독했다. 사실 설종이 그렇게 실력이 모자라는 의사는 아니었는데, 경진이 늘 무섭게 야단치니까 스스로 자신감이 떨어지며 자기가 바보가 아닌가, 의심하는 중이었다. 그러다 설종은 혹시 박경진이란 남자는 좋아하는 여자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아야 흥분하는 변태가 아닌가 왈칵 걱정이 되었다.
 '아씨, 진짜로 변태면 그럼 난 완전 신세 조지는 거잖아.'
 좋아하면 할수록 괴롭히는 남자라니, 이건 뭐 스토커도 아니니까 신고도 못하고 골병은 골병대로 드는 아주 까다로운 상대였다. 어쨌든 그의 마음을 알았으니 이제 그녀의 대응이 필요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 그러나 설종은 어둠 속에서 야비한 미소를 지었다.
 '새꺄! 네놈이 껄떡댄다고 내가 받아 줄 것 같으냐? 어림도 없다, 홧홧홧!'
 설종은 몸을 비틀어 돌아누우며 소리죽여 웃었다. 여태 자신이 게토레이에게 당한 것이 얼만데, 그런 성격 이상한 놈이 좋다고 덤빈다고 얼씨구나 옷고름을 풀 수는 없었다. 아무렴, 절대 그럴 순 없었다. 그녀에게도 자존심이란 게 있는데 말이었다.
 '애를 바짝, 바짝 태운 다음에 나중에 슬프게 돌아서며 말해줘야지. 미안해요오, 우린 인연이 아닌가보요오! 음후후후훗!'
 그때 게토레이의 일그러진 표정으로 무릎을 꿇으며 그녀를 괴롭혔던 걸 죽도록 후회할 것을 생각하니 통쾌함에 온몸이 떨리며 저절로 입이 벌어져 참을 수가 없었다. 설종이 부스럭거리며 연방 잠자리에서 이리저리 뒤척이자 옆 자리에 누운 항아가 작게 헛기침을 했다.
 "쫑아, 잠이 안 오니?"
 "어, 반. 안 잤어?"
 둘 다 자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알자 마음이 통한 두 사람은 아래층에 들릴까 소리를 한껏 낮춰 속삭이기 시작했다.
 "나 오늘 되게 놀랐어. 치프 샘 진짜 노래 잘하더라. 안 그래, 쫑?"
 "그러게. 노래를 잘하니까 카수! 앞으로 그 인간을 박카수 B라 불러주자."
 설종을 은근히 살피던 항아가 마른 침을 삼키더니 조심스레 말문을 뗐다.
 "근데 있잖아. 쫑아, 너 동욱 샘 어떻게 생각해?"
 "뭐?"
 "내가 보기엔 그 샘이 너한테 관심 있는 거 같던데. 못 느꼈니?"
 항아의 말에 어둠 속에서 설종의 눈동자가 데구르르 굴렀다.
 "그냥 되게 편한 선밴데. 같이 얘기하면 재미있고. 그뿐이야. 그 샘도 그런 눈치 전혀 없던데?"
 "그래.....?"
 뭔가 미적지근한 기분으로 항아가 한숨을 쉬었다. 눈치라곤 밥비벼 먹으려도 없는 설종이라 저렇게 말해도 믿을 수가 있어야지, 그녀는 답답하기만 했다. 언제부턴가 동욱 샘이 자꾸만 눈에 밟히는 그녀의 속병을 누가 알아주랴.
 반항아는 키 크고 몸매 좋고 똑똑하고 성격까지 좋은, 어떻게 보면 완벽한 여자였지만, 그 속을 파헤쳐보면 어딘가 불안정한 면이 있었다. 대학 1학년 때, 그녀가 무척 좋아한 선배가 있었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그를 사랑했던 항아는, 선배와 사귀게 되자 세상을 얻은 듯 기뻐했다. 그를 정말로 사랑했기에 몸과 마음의 순결도 아낌없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그에게 그녀는 그저 훈장처럼, 같이 자봤다고 친구들에게 자랑 할 수 있는 꺼리에 불과했다. 자신과의 성관계에 대해 떠벌리고 다녔던 선배 때문에 그 이야기가 돌고 돌아 마침내 그녀에게 돌아오자 항아는 너무나 큰 충격과 상처를 받았다. 그리고는 심한 남성 불신증을 가지게 되었다. 설종과 자영이 아무리 도와주려 노력해도 한 번 닫힌 그녀의 마음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예쁜 외모와 지성 탓에 그녀의 주변에는 항상 많은 남자들이 끓었으나, 그런 남자들과 의미 없는 만남을 계속 할수록 남자들의 이중성에 대해 더욱 깊이 알게 되었다.
 "남자들, 여자를 보면 하는 생각이 뭔지 알아? 무조건 저 여자랑 해 보면 어떨까 하는 것뿐이야. 예외라곤 한 놈도 없어. 그중에도 제일 웃긴 건 별별 지랄 다하고 돌아다니다가 장가갈 땐 처녀 찾는 놈들이야, 가끔은 그런 쓰레기들을 싹 죽여 버리고 싶어."
 성에 대해 솔직하고 적극적인 그녀가, 보수적이고 이중적 잣대를 가진 한국 사회에서 어쩌면 영영 행복해지지 못 할지도 모른다는 자괴감이 들 즈음, 항아는 자신이 동욱이란 남자에게 문득 끌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딘가 한 발짝 세상에서 물러서 관조하는 듯한 동욱의 독특한 분위기와 이따금 던지는 촌철살인의 한 마디가 그녀의 시선을 확 사로잡았다.장난기가 다분한 사람이지만 진지해야 할 때는 더없이 진지했다. 가끔 씨익 웃는 모습에 가슴이 철렁할 때도 있었다. 치프 경진이나 병원의 몇몇 괜찮은 레지던트를 보면 간혹 눈길이 가며 섹시하다 느끼긴 했지만 동욱처럼, 그 사람 마음에 들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너무나 오랜만이었다. 첫사랑의 그 개자식 이후로 처음이라 무를 만큼.
 그런데 하필 같은 의국원인데다 동욱은 설종에게 마음이 있어 보였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설종과 자영과는 평생 함께 가고 싶었기에 항아는 자신의 남자관계로 우정에 지저분한 얼룩이 지도록 하고 싶지 않았다. 한마디로 쉽게 건드리기 힘든 남자였다. 항아는 낮게 한숨을 쉬고는 잠을 청하려 눈을 감았다. 내일은 돌아가는 날이었다.

그녀의 정신세계 #5 (삽질은 삽질을 낳고)

회진을 마치고 병동을 도는데, 설종은 자꾸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상하게 앞이 어질어질하고 현기증이 나는 것이 몸 상태가 평소와 달랐다.
 '요즘 너무 무리를 했구나.'
 계속 잠을 제대로 못 잔데다 어젯밤엔 당직까지 섰더니 몸살이 난 모양이었다. 뺨이 자꾸 화끈거렸다.
 "쫑, 괜찮아? 어디 아픈 거 아냐?"
 "뭐, 그냥. 몸살기가 있네."
 "큰일이다. 열나는 거 아니니?"
 항아가 걱정스런 눈으로 물었지만 설종은 힘없이 웃었다. 차라리 큰 병이면 당당하게 입원이라도 할 수가 있지만 몸살감기쯤은 불치병이 난무하는 병동에서 명함도 못 내밀었다. 그런 걸로 아프다고 누우면 선배들의 눈총을 피하기 어려웠다.
 "이러다 말겠지. 해열제 있니?"
 "잠깐만. 내 책상 서랍에 있어. 갖다 줄게."
 항아가 사라진 뒤에 스테이션에 잠시 엎드려 있던 설종은 곧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김설종. 어제 당직 스케줄표 만들라는 거 다 했어?"
 치프가 그녀에게 묻자 설종은 고개를 저으며 기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젯밤에는 너무 바빠 미처 할 시간이 없었다.
 "아직 못 했는데요."
 "오늘 저녁 회진 전까지는 해 와. 그리고 박선호 환자 사진 찍은 거 어디 있어?"
 "네, 그건 이쪽에 ....."
 설종이 의자에서 일어나 한 걸음 떼는 순간, 속에서 구역질이 나더니 시야가 새까맣게 변했다. 그녀는 안간힘을 써서 쓰러지지 않으려 버텼다.
 "왜 그래?"
 비틀거리는 그녀를 불안한 눈으로 보던 경진이 조금씩 다가오며 물었다.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안 나왔다. 잠깐 눈을 감고 있으니 괜찮은 것 같아 한 발짝 옮긴 순간, 설종은 그 자리에 쓰러졌다. 긴 다리로 성큼 뛰어온 경진이 다행이 그녀의 몸을 받았다.
 "김 선생, 김설종!"
 치프가 쓰러진 그녀를 품에 안고 마구 흔들었지만 설종의 의식은 까무룩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설종이 혼절하자 경진은 품에서 펜 라이트를 꺼내 동공부터 살폈다. 별 이상이 없는 것으로 보아 뇌출혈은 아닌 것 같았지만 뺨에 손을 대어보니 열이 심하게 났다. 그때 워드로 돌아온 항아가 깜짝 놀라 소리를 쳤다.
 "어머, 쫑아! 얘 왜 이래요?"
 "syncope(기절)이야. fever(열)도 있고. 김 선생 어디 아픈가?"
 "네. 아침부터 몸살기가 있다고 했어요. 요새 계속 잠을 못 잤거든요."
 항아의 말을 듣던 경진이 설종을 등에 업고 턱짓을 했다.
 "권동욱 선생한테 이 차트 갖다 주고 잠깐 외래 좀 봐달라고 해. 내가 김 선생 숙소에 데려다 줄 테니."
 "네. 다녀올게요."
 항아가 경진이 부탁한 차트를 들고 사라지자 그는 설종을 업은 채로 숙소로 뛰듯이 걸어갔다. 침대에 설종을 눕힌 그는 책상 주위를 둘러보며 체온계를 찾았다. 서랍을 드르륵 열어 눈으로 쓱 훑었지만 체온계는 눈에 띄지 않았다. 반항아더러 오는 길에 챙겨오라고 전화해야겠다고 생각한 그때, 작은 편지지가 경진의 눈에 띄었다. 봉투에 '박 치프 선생님께.'라고 쓰여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고개를 들고는 누운 설종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가 여전히 눈을 꼭 감고 자는 것을 확인하자 가만히 손을 뻗어 핑크빛 편지지를 펼쳤다.
 '존경하는 박 선생님께' 로 시작된 편지지를 쭉 읽은 그의 얼굴이 웃는지 찡그리는지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묘하게 굳어버렸다. 그때 복도에서 울리는 발소리를 들은 그는 얼른 편지를 자기 가운 주머니에 집어넣고 서랍을 닫아버렸다. 문이 벌컥 열리며 항아가 들어오자 경진은 평소와 다름없는 낮고 굵은 목소리로 물었다.
 "체온계 있어?"
 "네. 제 책상에."
 항아가 체온계를 가지러 가자 경진은 문으로 걸어가며 그녀에게 당부했다.
 "체온 재어보고 열 있으면 해열제 먹이고 수액 좀 달아 줘. 오늘 하루는 푹 쉬게 하고."
 "네, 샘."
 설종의 숙소를 빠져나오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경진은 걸음을 멈춰 설 수 있었다. 손을 들어 이마를 짚는데 난데없는 식은땀이 만져졌다. 땀이 묻어난 자기 손을 낯설게 바라보던 그는 실소를 머금었다. 가운 주머니에 든 핑크빛 편지지가 자꾸 신경이 쓰였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편지를 꺼냈다. 작은 편지지지만 그의 마음을 휘젓기엔 충분했다.
 '편지는 차마 못 주고 초콜릿만 준 걸까.'
 그녀가 주었던 커다란 초콜릿이 문득 생각이 났다. 설종에게 받은 뒤 가운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것을 현아가 무척 부러운 눈으로 보기에 어쩔 수 없이 주긴 했지만 그날 내내 마음이 쓰이던 것이었다. 그는 잠시 훔친 편지를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그냥 버릴까 하는 생각에 둘러보니 마침 바로 옆에 쓰레기통이 보였다.
 그는 잠시 쓰레기통을 바라보다 대신 그 편지를 가운 속, 와이셔츠 주머니 안으로 깊숙이 넣어버렸다. 그런 뒤경진은 자기 대신 외래를 보고 있을 동욱과 교대하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붉게 상기된 것이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화난 듯 일부러 입매를 꽉 다물고 있었지만 언뜻 눈동자에 스쳐가는 설렘은 지우기가 어려웠다.
 설종이 정신이 든 것은 점심때가 지나서였다. 창백한 얼굴로 몸을 부스스 일으킨 그녀는 자신이 숙소에 누워 자고 있었던 것을 알고 어리둥절했다. 잠시 망설이다 항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반.나 어떻게 된 거야?"
 [너 워드에서 신콥해가지고 치프 샘이 업고 왔어.]
 "진짜?"
 설종의 눈이 동그래졌다. 쓰러지면 갖다버리라고 할 놈이지 업고 올 인간은 아닌데, 치프가 대체 웬일인가 싶었다.
 [그래. 너 오늘 푹 쉬게 하래서 당직도 진우가 땜빵 서는 중이다. 나중에 진우한테 고맙다고 해. 나 바빠. 끊어.]
 항아가 전화를 끊었지만 벌어진 설종의 입은 쉽게 다물어지지 않았다.
 "이 인간이 뭘 잘못 처먹었나? 아니면 죽을 때가 된 건가. 흐미! 엄니, 나 이러다 난중에 덤터기 쓰는 거 아닌감유?"
 그동안 둘째간다면 서러울 만큼 자신을 갈구던 치프가 갑자기 보드랍게 나오자 덜컥 겁이 난 설종은 불안감에 떨며 어쩔 줄 몰라했다. 잘 해줘도 행복한 줄 모르는, 참 불쌍한 인생이었다.
 "이게 뭐야?"
 저녁 시간, 식당에 내려와 밥을 먹는 경진의 테이블에 슬그머니 다가온 설종이 음료수 하나를 건네자 그가 의외란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냥요. 샘 드시라고요. 식사 맛있게 하세요."
 설종은 고개를 꾸벅 하고는 항아가 기다리는 제 테이블로 돌아갔다. 경진은 그런 설종의 뒷모습을 슬쩍 바라보다 다시 묵묵히 식사를 계속했다. 경진은 밥 먹는 내내 그녀가 준 음료수는 한 번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식사를 모두 마쳤으나 식당을 나서는 길, 그의 가운 주머니는 음료수 캔 하나가 버젓이 들어있었다. 그 음료수는 바로 문제의 '게토레이'였다.
 "진짜로 들고 갔어. 나중에 알면 어쩌려고 넌 치프 샘한테 저런 걸 주니?"
 항아가 염려하는 눈빛으로 설종의 옆구리르 쿡 쳤지만 그녀는 태연했다.
 "말 안 하는데 어떻게 알아? 너나 자영이만 입조심하면 아무도 몰라."
 "난 왠지 자꾸 불안하다,얘."
 "뭘 그래. 좋은 맘으로 줬어. 나 업어 줘서 고맙다고."
 과연 설종이 좋은 맘으로 게토레이에게 '게토레이'를 줬을까, 의심스러운 항아였다. 두 사람이 식사를 마치고 당직실로 왔을 때, 진우와 영식은 백지를 가운데 두고 뭔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었다.
 "어, 잘 왔다. 월궁, 쫑! 우리 이달 야식비 동났다. 사다리 타기해서 모아야 할 시기가 왔어."
 "내가 돈이 어디 있냐? 먹고 죽으려 해도 없다."
 "그럼 오늘 밤부터 야식으로 피자 시켜도 쫑 넌 절대 안 준다?"
 "아 씨, 알았어. 난 1번."
 "월궁항아는 몇 번?"
 "난 3번."
 그때 당직실 문이 열리며 치프가 불쑥 들어왔다. 떠들썩하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잠잠해졌다. 경진이 설종을 보며 손짓을 했다.
 "혹시 스케줄 표 작성했어?"
 "아, 네. 잠깐만요."
 오후에 잠시 쉬는 동안 완성해 놓은 스케줄 표를 설종이 찾는데, 나머지 세 사람은 소리를 죽인 채 계속 사다리를 타고 있었다. 그러다 모두들 크게 웃으며 설종을 가리켰다.
 "쫑, 넌 3만 원 당첨!"
 "아, 뭐야! 뭐가 그렇게 비싸!"
 설종이 투덜거리는데, 문 앞에 서 있던 경진이 진우에게 넌지시 물었다.
 "지금 뭐하나?"
 "아, 예. 야식비 사다리 타고 있습니다. 치프 샘도 괜찮으시면 동참하시죠. 고통을 분담하는 사회, 아름답지 않습니까?"
 넉살 좋은 진우가 너스레를 떨자 경진이 피식 웃더니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척 꺼냈다.
 "자, 보태."
 눈처럼 하얀 수표가 나오자 다들 탐욕에 어른거리는 눈빛을 빛내며 기쁜 함성을 질렀다.
 "수표! 수표!"
 그중에도 영식은 박수까지 쳐가며 희열의 함성을 외쳤다.
 "치프 샘, 감동입니다. 끝내줍니다."
 "멋져요, 샘!"
 그 어수선한 와중에 스케줄 표를 찾은 설종이 경진에게 내밀자 그는 그것을 받고 돌아섰다.
 "다들 수고해라."
 "네. 샘. 살펴 가십시오."
 경진이 나가자 흥분한 항아가 발갛게 달아오른 볼을 하고 황홀하게 중얼거렸다.
 "자, 보태! 그러면서 수표를 슥! 아, 너무 멋져. 어떡해!"
 "지랄을 떤다."
 설종이 심드렁히 말했지만 항아는 한껏 들떠 조잘거렸다.
 "넌 기절해서 몰랐을 테지만 너 업고 갈 때도 얼마나 괜찮았는데.기럭지가 되니까 뭘 해도 폼이 나는 게! 나 정말 반할 것 같아."
 항아의 말을 들으면서도 설종은 어딘가 불편한 마음으로 이마를 찌푸리고 있었다.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벌어진 사태를 냉철하게 분석했다.
 '치프 그 인간이 항아를 좋아하는 게 틀림없스야.'
 그렇게 생각하니 아귀가 척척 맞아 들어갔다. 자신을 업어준 것도 친구 항아에게 멋있게 보이고 싶어서이고, 수표를 척 꺼낸 것도 항아 먹으라고 아낌없이 퍼준 것이다. 설종은 눈을 돌려 항아를 보았다. 예쁘고 똑똑하고 착한 친구였다. 치프도 설종 혼자 싫어해서 그렇지 객관적으로 보면 키크고 일 잘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둘이 나란히 서면 그렇게 잘 어울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슴 어딘가가 묘하게 허전했다. 그렇게 싫어하고 욕하던 남자였는데, 막상 그의 마음에 든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하니 아랫배가 찌르르 쑤셨다.
 "정이 더럽다더니, 미운정이 들었을 줄이야."
 "뭐라고?"
 "아냐. 야, 치프가 10만원이나 냈으니 이번 사다리는 무효로 하는 거다?"
 "김설종, 그깟 3만 원 안 내려고 악을 쓴다? 그래, 아무튼 좋다. 무효로 해 주마."
 치프 때문에 가장 덕을 본 것은 자신이면서 그의 마음이 이어지는 길은 짐작조차 못하는 설종을 어리바리의 원조라 불러도 아깝지 않으리.

 무슨 일이든 한 번 오해하여 짙은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수습이 어려울 만큼 걷잡을 수 없이 돌아가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설종은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채 그 파멸의 길로 한 발짝 한 발짝 착실히 들어서고 있었다.
 영원한 천적 게토레이 치프(줄여서 게칲이라 하자)와 자신의 동거녀 반항아와의 염문설이 그녀의 레이더에 띠띠띠 포착된 이후로 설종의 예민한 더듬이는 줄곧 꼿꼿이 세워진 채 산들바람에도 마구 흔들리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백 일 당직 중에도 며칠에 한 번씩 남자 맛을 보았다는 항아의 놀라운 증언과 게칲이 느끼한 표정으로 돈지랄하며 꺼낸 하얀 수표에 열광하던 친구의 모습을 종합해 보건대, 하루 만에 타당한 결론이 튀어나왔다.
 '그년이 며칠 전에도 응응응 했다는 미스테리한 상대놈이 게칲이 맞지라. 틀림이 없지라.'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척척 맞아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일단 확신이 생기자 뭉글뭉글 피어나는 설종의 상상력이 뿌연 영상을 조합해내기 시작했다. 육욕에 못 이긴 항아의 붉은 입술에서 날름거리는 혀가 게칲의 가슴을 핥자, 게칲이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마구 항아에게 키스하며 애무를 시작하고..........
 "대답하라니까, 김설종, 뭐하나!"
 "네, 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설종이 두 눈을 깜빡거리고 있자 질문을 던진 경진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이 환자의 경우 청진 소견을 말하라고!"
 "아, 저."
 의국 컨퍼런스 시간에 딴 생각에 푹 빠져 질문에 대답할 타임을 놓쳐버린 설종은 그제야 사태를 파악하고 어쩔 줄 몰라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녀가 머뭇거리자 치프가 이마를 세게 찌푸렸다.
 "정신 안 차리지? 반 선생, 네가 대답해 봐."
 "네. 췌장 두부암의 경우는 십이지장을 압박하기 때문에 위에서 소장으로 음식물이 잘 내려가지 않아 청진시 역류음이 들립니다."
 똑 부러진 항아의 대답에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경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 선생, 잘했어. 김설종, 넌 컨퍼런스 마치고 의국으로 와!"
 항아에게는 따사로운 눈빛으로 웃어주면서 자신에게는 독사 같은 표정으로 이를 드러내는 경진의 이중성에 설종은 몸서리를 쳤다. 슬쩍 옆을 보니, 친구가 떡이 된 건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지 저 칭찬 좀 받았다고 볼을 발그레 붉히며 배시시 웃는 반을 보니 더욱 배신감이 뼛속에 사무쳤다.
 '이런 잡것들! 그래 두 연놈이 잘 처먹고 잘 살아라.'
 이래서 사내연애는 금지한다는 말이 나왔나보다. 단체생활 직장인의 능률성을 현저히 저하시키는 원인이 백 번 되고도 남았다. 누가 드러란 것도 아닌데 괜히 혼자 열 받은 설종은 입을 닷 발이나 내밀고 컨퍼런스 발표에 집중했다. 그렇게 컨퍼런스를 다 마치고 야단맞으러 의국에 불려간 설종은 또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경진의 꾸중을 들어야했다.
 "제발 정신 좀 차려라. 딴 생각 안 하면 졸고 있고, 대체 왜 그래? 1분 1초도 허비하지 않고 보내야 하는 시간에!"
 '이 인간은 어찌 그리 귀신같이 내가 졸 때나 딴 생각할 때를 잘도 집어내나 몰라? 보면 항아도 딴 짓 할 적 많구만, 그때는 절대 안 들키던데......혹시 봐 주는 것 아냐? 맞당께! 알고 보니 이것들이 다 짜고치는 고스톱이었당께!'
 순간적으로 스쳐가는 깨달음에 그녀의 눈빛이 반짝였다. 괜히 억울함이 울컥 솟구쳐 올랐다. 그녀는 슬그머니 눈을 들고 야단치는 경진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반이 저런 스타일을 좋아했던가?'
 지적인 인상을 강조하는 검은 뿔테와 그 안에 든 신기한 색깔의 눈동자가 다시 눈에 밟혔다. 안경 벗기고 똑바로 좀 봤으면 소원이 없을 텐데, 지금 그런 짓을 하면 사표를 써야할지도 몰랐다.
 "아무튼, 똑바로 해."
 "알겠습니다."
 설종이 고개를 꾸벅 숙이는데,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며 항아가 들어왔다. 방긋 웃는 얼굴이 매일 보는 설종의 눈에도 기똥차게 예뻤다. 설종은 눈동자를 슥슥 굴려 두 연놈이 하는 작태를 살폈다. 설마 여기서 일을 벌일 작정인가. 여태 이렇게 은밀한 정사를 수없이 벌여왔던 것일까.
 "어, 반 선생. 들어와. 김 선생은 나가 봐."
 '세상에, 나까지 내보내고 둘이 진짜로 시작하려고?'
 설종은 계속 뭉그적거리고 있었지만 그가 나가라고 눈짓을 하자 어쩔 수 없이 비적비적 밖으로 나갔다. 문을 닫는 척하면서 아주 약간 열어둔 그녀는 한쪽 눈을 감고 의국 안을 몰래 살폈다. 치프는 설종이 들어왔을 때와 다름없이 의자에 앉아 있고 반은 그 앞에 서서 뭐라 뭐라 계속 말을 하고 있었다.
 '시방 뭐시라 시부렁거리는 것이여? 옷은 언제 벗기나? 그냥 안 벗고 하나?'
 대화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아 그녀가 바짝 귀를 기울이는데, 갑자기 누군가 뒤에서 설종이 덮치며 고함을 질렀다.
 "왁!"
 "워매!"
 하던 짓이 하던 짓이라 정말이지 심장이 떨어질 만큼 놀란 설종이 쟁반처럼 둥그런 눈으로 돌아보니 동욱이 얼굴에 온통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여기서 뭐해?"
 "몰라요! 놀랐잖아요."
 신경질도 나고 몰래 훔쳐보았던 것이 너무나 부끄러웠던 설종은 소리를 버럭 지르며 그를 밉게 쏘아보고는 얼른 도망쳐버렸다. 그녀가 뛰어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동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의국 안에 경진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경진이가 어지간히 좋기는 좋은 모양이네. 문밖에서 몰래 훔쳐보기까지 하고."
 '제대로 된 대화'라는 것을 모르는 채 자기만의 세계에 푹 빠진 헛다리 삽질 콤비들의 오해는 그렇게 날로 깊어만 갔다. 통탄할 일이로고.

 점심시간, 수술 환자를 보느라 밥 때를 놓쳐 버린 설종은 뒤늦게 혼자 식당으로 내려갔다. 배식 시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어선지 식당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좋아하는 갈비찜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녀는 기쁜 마음으로 한 주걱 떠서 식판에 얹었다. 창가에 앉아 밥을 먹는데, 테이블로 누군가 다가왔다. 눈을 들어보니 경진이었다.
 "어, 샘. 식사하시죠."
 "음."
 설종이 놀라 허리를 펴자 경진은 슬쩍 고개를 끄덕여준 뒤 그녀 맞은편에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이놈의 자식은 하고 많은 자리를 두고 왜 내 앞에 앉는 것이냐. 눈치 보여 밥도 안 넘어가게 시리.'
 설종은 속으로 구시렁대며 고개를 푹 숙이고 갈비찜만 열심히 뜯었다.
 '아,씨. 짜증나게 갈비찜은 오늘따라 또 왜 이리 맛있는 것이야.'
 맘 같아선 식판을 들고 일어나 갈비찜을 더 받아오고 싶었지만 왠지 그러자니 게칲이, 넌 걸신이라도 들렸냐고 욕할까 봐 쪽팔려서 그러지도 못하고, 설종은 뼈다귀만 아쉽게 쪽쪽 빨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경진이 제 식판에 있던 커다란 갈비찜 덩어리를 집어 그녀의 식판에 놓아 주었다. 놀란 설종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았다.
 "어머! 샘은 안 드세요?"
 "난 별로."
 "되게 맛있는데........왜 안 좋아하시지?"
 설종이 혼잣말로 중얼거렸지만 그는 눈을 내리깔고 묵묵히 식사를 계속했다. 설종은 그런 그를 흘끔 보다 갈비를 들고 맛있게 뜯기 시작했다.
 '인간 망종인 줄 알았더니, 제법 인정머린 있구먼 . 좋다. 이만하면 항아 짝으로 손색이 없어. 넌 합격! 아, 입 안에서 살살 녹는다, 녹아.'
 갈비찜 한 덩이에 친구를 팔아넘긴 설종은 행복하게 식사를 마쳤다. 그녀는 옆에 있는 자판기에서 뜨거운 커피를 두 잔 뽑아 테이블로 가져왔다.
 "샘, 커피."
 "어."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커피를 홀짝이며 말없이 앉아있었다. 그러다 경진의 눈치를 살피던 설종이 흠흠 헛기침을 하고 벼르던 말을 꺼냈다.
 "저.......샘. 반항아 선생 있잖아요."
 "음."
 "예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설종의 물음에 경진이 의아한 시선으로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잠시 눈을 깜빡이던 그는 선선히 대답했다.
 "예쁘지. 그 정도 예쁘기도 쉽지 않지. 근데 왜?"
 경진이 수긍하자 설종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역시. 좋아하는구먼. 하아, 항아야, 요년아. 이 언니한테 나중에 고맙다고 절해라.'
 설종은 방긋 웃으며 열심히 친구의 칭찬을 했다.
 "그냥요. 같은 여자인 제가 봐도 항아는 예쁘고, 착하고, 똑똑하고 일 잘해요. 안 그래요?"
 "잘 아네. 그런데 넌 반 선생 보면서 느끼는 거 없어? 나도 이제 사고 그만 치고 일 좀 잘해봐야겠다는, 뭐 그런 생각."
 경진이 갑자기 화제를 돌려 그녀를 구박하자 설종의 얼굴이 확 굳었다.
 '새꺄! 그래 항아 년은 잘나 빠졌고 난 개털이다, 왜? 네가 보태준 거 있냐?'
 잠시 성깔이 치솟긴 했지만 그놈의 우정이 뭔지, 설종은 억지로 마음을 추스르고 친구를 위해 하고픈 말을 이어갔다.
 "샘, 있잖아요.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 마음을 고백하는 거, 어떻게 생각해요?"
 "뭐?"
 "아니, 예를 들어 샘이나 제가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가정하면요, 그걸 고백하는 게 좋을까요, 그냥 가슴 속에 간직하는 게 좋을까요?"
 설종의 뜬금없는 말에 가만히 귀 기울이던 경진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설종의 의도가 뭔지 골똘히 생각하는 눈빛이었다. 그를 조용히 응시하던 설종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한 마디 했다.
 "그냥, 한 번 생각해 보시라고요. 가끔은 용기라는 게 필요할 때도 있더라고요. 저 그만 올라가 볼게요."
 설종이 그렇게 사라진 뒤에도 경진은 그 자리에 한참이나 앉아 있었다. 이윽고 천천히 식당을 나오던 그의 뇌리에 번뜩 스치는 생각.
 '쟤가 지금 나 좋아한다는 소릴 돌려서 말한 거야? 그러니까 간접 고백이야?'
 갑자기 그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는 갑자기 주변이 확 더워지는 것을 느끼고는 얼굴에 손부채질을 했다. 그런 말쯤 들었다고 심장이 춤을 추고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이 어쩐지 못마땅해 경진은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의국으로 올라갔다. 삽질은 삽질을 낳고 오해는 오해를 낳는다는 진리를 외면한 그들의 행보는 앞으로도 계속된다, 쭈욱.

 날이 많이 더워졌다. 내일이 초복이라선지 가만히 있어도 등에 땀이 주르르 흘렀다. 병원 안은 냉방 시설이 잘 되어 무척 시원하긴 했지만 늘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하는 노가다 1년차는 더위를 제대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김 샘, 저기 할머니 길에서 기절해서 오셨어요."
 인턴이 가리키는 대로 설종이 다가가자 머리가 하얗게 센 노부인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할머니, 좀 어떠세요?"
 "어지럽네요."
 "제가 좀 봐드릴게요. 똑바로 누우세요."
 설종이 동공과 심전도를 살피며 이런저런 검사를 해 봤지만 별다른 것은 없었다. 더위를 먹어 기력이 허해진 것이라 생각될 뿐이었다. 그런데 저녁 여섯 시쯤 치프가 내려와 그녀를 불렀다.
 "혹시 아까 할머니 한 분 오셨어? 쓰러지신 분."
 "네. 저기에."
 설종이 가리킨 쪽에 간 치프는 노부인에게 말을 걸며 다시 세심히 진찰을 했다. 한참 치료를 하던 그가 스테이션으로 오더니 설종을 불렀다.
 "저 할머니 권 교수님 어머니셔. VIP니까, 신경 써."
 그제야 왜 치프까지 호출이 되었는지 이해한 설종이 의미심장하게 할머니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 이상은 없었지?"
 "네. 더위 먹으신 것 같더라고요."
 "그런 것 같더군."
 스테이션에 앉아 설종이 내민 차트에 기록을 하던 치프가 문득 설종을 보았다.
 "이젠 심전도 좀 알겠나?"
 그러자 쑥스러운 표정으로 설종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네.예전보다 훨씬 낫네요. 아직은 부족하지만."
 "많이 읽고, 분석해. 그러다 보면 나중엔 저절로 보여."
 "네.알겠습니다."
 설종이 대답하자 차트 기록을 마친 경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밤 김 선생이 응급실 당직이야?"
 "네."
 "그래. 수고해. 말한 대로 할머니 잘 살피고 어지러우신 것 나아지면 병실로 옮겨드려."
 "네."
 치프가 사라진 뒤에 다시 환자를 보던 설종은 응급실 간호사가 슬그머니 다가와서 그녀를 살짝 부르자 의아한 표정으로 처치실로 들어갔다. 그러다 그 안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와, 이게 다 뭐예요?"
 "내과 치프 선생님이 시켜 주셨어요. 응급실에서 나눠 먹으라고."
 "세상에........"
 언젠가 설종에게 사준 적이 있던 초밥과 새우튀김, 장어덮밥에 도미 회까지. 배달된 요리를 하나하나 살피던 설종의 두 눈이 놀라움에서 금세 탐욕으로 변했다.
 "젓가락 어디있어요, 젓가락!"
 설종이 울부짖자 간호사가 여유롭게 나무젓가락을 내밀며 안심시켰다.
 "여기요. 천천히 드세요. 아무도 안 뺏어가요."
 "말 시키지 말아요. 뭐부터 먹지? 아!회!"
 제일 좋아하는 회부터 간장에 찍어 입 안에 넣자 쫄깃하게 씹히는 질감에 설종의 뺨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어떡해...........너무 맛있어."
 눈물을 글썽이며 하나하나 맛을 보는데 무심결에 처치실로 들어오던 항아가 그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이게 뭐하는 짓이야!"
 "회 먹는 지시이야. 빨리 와서 젓가락이나 잡아."
 항아 역시 회와 초밥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건 설종과 마찬가지였기에 두 사람은 행복해 죽겠다는 얼굴로 응급실 식구들과 함께 즐거운 저녁 시간을 마쳤다. 다 먹고 그릇을 치우는 데, 항아가 설종에게 넌지시 물었다.
 "근데 이게 웬 건데? 환자가 사줬니?"
 "아니? 치프가 시켜주더라?"
 "뭐? 우리 내과 치프?"
 "응. 커피 마셔. 자."
 설종이 내민 커피를 후루룩 마시며 가늘게 눈을 뜨고 생각에 잠겼던 항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치프가 좀 이상해. 냄새가 나."
 "그렇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응. 치프가 다른 속셈이 있는 게 분명해. 아무래도 치프가 좋아하는 사람이 이 안에 있어."
 설종이 여태 의심해 왔던 사실을 항아가 꺼내자 그녀도 맞장구 치기 시작했다.
 "반,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응?"
 "물론이지. 나의 날카로운 육감이 말해 주건데, 그 사람은 바로............"
 "바로............"
 "너!"



 "너!"
 둘이 동시에 삿대질을 하며 서로를 가리킨 두 사람은 황당한 얼굴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항아가 자신을 가리키자 설종은 먹던 커피를 내려놓고 침까지 튀겨가며 흥분했다.
 "뭔 소리야, 반! 치프는 너 좋아해. 틀림없다고. 육감 좋아하시네. 아예 육갑을 떨어라, 이년아!"
 "말도 안 되는 소리.너야, 너. 김설종이라고."
 "웃기지 마."
 "뭐가 웃긴데? 치프는 너 좋아한다니까?"
 반이 단호하게 내뱉자 설종은 입술을 쑥 내밀며 이상하단 표정으로 친구를 보았다.
 "뭘 보고 그런 생각이 들디?"
 "밸런타인데이 때 초밥 사준 것도 그렇고, 너 쓰러졌을 때 사색이 되어서 업고 가던 것도 그렇고, 사다리 탈 때 네가 삼만 원 걸렸다고 징징대니까 얼른 수표 내 줬잖아. 오늘만 해도 너 응급실 당직이라고 이런 거 시켜 주고. 안그래?"
 반이 하나하나 꼽으며 주지시키자 점점 설종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너, 너하고 같이 먹으라고 시켜 준 거겠지."
 "나는 오늘 중환자실 당직인걸? 검사지 가지러 잠시 내려왔다가 운 좋게 얻어먹은 거고."
 그렇게 듣고 보니까 또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회색빛 안개에 싸인 것처럼 음흉하기만 한 게토레이의 속마음을 누가 짐작하랴.
 "반! 너 그럼 며칠 전에 거시기 했다는 그 넘이 치프 아녔어?"
 설종이 진지하게 묻자 잠시 어리둥절하던 반은 푸하하 웃어버렸다.
 "얘는! 매일 마주봐야 하는 의국 사람하고 어떻게 그래! 그 사람은 병원 사람도 아니고, 벌써 끝났어."
 항아가 딱 잘라 아니라고 말하자 설종은 그간 자신이 오버했던 일이 생각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버렸다. 그간의 일은 아무리 친한 반이라도 죽을 때까지 묻어두리라 결심한 그녀였다. 그렇게 항아가 푹 찌르고 간 뒤, 설종은 그날 저녁 내내 마음속으로 고민을 하게 되었다.
 '진짜일까? 아니겠지. 그 인간이 날 좋아할 리가.............그래도 진짜면? 진짜로 나 좋아하는 거면?'
 갑자기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쿵쿵쿵. 이상하게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나오고 막 더워진 설종은 달아오른 자기 얼굴을 손부채로 세게 휘저어 식였다. 괜한 소리를 지껄여 마음을 들뜨게 한 항아에게 원망이 갔다.
 "아따! 징한 년. 허벌나게 씨부리더만 가슴까지 벌렁벌렁 한당께!"
 새벽에 환자가 거의 업자 당직실에서 잠시 눈을 붙이려던 설종은 잠이 드는 마지막 순간에 경진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어떤 색깔이다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마블링처럼 신비로운 그의 눈.
 "눈동자가............정말 예뻤어."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그녀는 죽은 듯 잠에 빠졌다.

 설종가 항아가 그런 결론을 내린 것이 무색하게도, 다음 날 아침 회진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의국에서 치프에게 엄청나게 깨지고 있었다. 미비차트가 많아 의무기록실에서 연락이 온 때문이었다.
 "몇 번을 얘기했어! 차트 미루지 말라고."
 "죄송합니다."
 "네 그 죄송하단 말도 이젠 지겹다. 대체 언제쯤 정신을 차릴래? 저번에도 말이야........"
 날이라도 잡았는지 작정하고 계속되는 그의 잔소리를 들으며 설종은 맘속으로 항아를 열심히 씹고 있었다.
 '이년아, 이 지랄이 좋아하는 것이면 사랑이라도 했다간 살인나겠다. 내가 미친년이지. 그런 걸 친구라고 두고 하는 말에 귀 기울이고 앉았으니.'
 "그런 태도로 의사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면......."
 고개를 푹 숙인 채 치프가 하는 말을 듣고 있던 설종은 가급적 딴 생각을 하도록 노력했다. 다 듣고 있기는 너무 지겹고 짜증이 났다.
 '새꺄! 너는 씨월씨월 씨부리라. 난 딴 생각을 할 텐게.'
 그러면서 땅을 쳐다보는데, 옆 탁자에 앉은 3년차의 발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평소 무좀이 심했던 그 선배는 다섯 발가락 양말을 신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뿐이면 어떻게든 참아 보겠는데 그 선배가 책을 보면서도 자꾸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다섯 개의 발가락이 따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자니 어쩐지 웃음이 나와 견딜 수가 없었다.
 '우,웃겨! 참을 수가 없어. 하지만 웃으면..........저 인간이 날 죽이려 달려들 건데.'
 설종은 필사적으로 참았지만 저절로 벌어지는 입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일부러 앞니로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그 아픔에 웃음은 조금은 잦아들었다. 다행이었다. 그러나 이제 선배는 발가락으로 피아노를 치는 것처럼 리드미컬하고 버라이어티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안 보려 해도 안 볼 수가 없었다. 마약에 중독이라도 된 것처럼 저절로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크큭, 핫, 코, 콧김이 새어 나와! 웃음이 새고 있어, 안 돼!'
 "크으흐읍!"
 거친 호흡이 확 새어 나오자 설종은 얼른 손을 들어 입과 코를 막으며 어금니를 물었다. 눈이 저절로 웃는 모양이 되자 그녀는 일부러 얼굴을 세게 찡그렸다. 그녀가 눈을 꼭 감고 입을 막은 채 울상을 지으며 몸을 부들부들 떨자 그때까지 야단을 치던 경진이 순간 말을 멈추고 설종의 얼굴을 살폈다.
 ".......너, 우냐?"
 걱정스러움이 깃든 어투로 그가 물었지만 설종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입을 가린 손을 떼면 미친년처럼 그대로 웃어젖힐 것 같았다.
 '울고 싶다, 짜샤! 너무 웃긴데 못 웃는 심정을 너는 아느냐?'
 설종은 입을 막은 채 강하게 고개를 흔들었지만 의국 내의 레지턴트들은 그녀가 갑자기 흐느끼기 시작했을 때부터 모두 두 사람이 하는 양을 몰래 주시하고 있었다. 말없는 시선들이 그를 흘겨보며, 애를 울리다니 좀 심한 것 아니냐는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해왔다. 멋쩍어진 경진이 헛기침을 하며 턱짓을 했다.
 "됐어. 그만 나가 봐."
 천만다행으로 웃던 것을 들키지 않은 그녀는 그대로 고개를 푹 숙이고 인사하고는 의국을 빠져나왔다. 벌게진 얼굴로 의국복도를 미친 듯이 뛰어가는데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동욱을 보았지만 설종은 인사도 못하고 그대로 지나쳤다. 되는대로 비상구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간 그녀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맘껏 웃기 시작했다.
 "오, 예! 살다보니 이런 스킬도 통하는구나! 아하하하! 아하하하하!"
 아무도 없는 비상구에서 설종은 참았던 웃음을 마구 터뜨렸다. 이런 식이면 인생도 참 살만 했다. 한참 웃고 나니 쌓였던 스트레스가 확 풀어졌다. 설종이 가벼운 마음으로 비상구 문을 다시 열고 나가려 하는데 누군가 그 문으로 쑥 들어왔다. 설종은 뒷걸음질 치며 그 사람이 누군지 살폈다. 그게 놀랍게도 준우인 것을 알고 설종은 얼른 인사를 했다.
 "어머,안녕하세요! 박준우 선생님."
 "아, 김 선생. 오랜만이야."
 "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응, 나야 그렇지 뭐."
 설종은 그의 표정을 가만히 응시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오늘따라 더 환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간 계속 벼르던,가장 궁금하던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저.....선 보셨던 거, 잘돼 가세요?"
 그러자 준우의 뺨이 확 붉어지더니 입가의 미소가 진해졌다.
 "그걸 아직 기억하네? 하하. 그게, 보름 뒤에 약혼식 치르게 됐어."
 쿵.
 설종의 입매에 경련이 일었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직접 들으니 그렇게 큰 충역일 수가 없었다. 그녀의 심장이 박자를 놓치고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애써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축하드려요. 정말."
 "고맙다. 김 선생."
 "청첩장 보내 주시면 축의금 많이 넣을게요."
 "하하. 뭘 그런데 신경을 써! 아무튼 고마워."
 그렇게 그는 계단으로 사라졌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빠져 서 있을 수가 없었던 설종은 벽에 몸을 털썩 기댔다. 이젠 정말 모든 미련을 접어야 할 때가 온 것이었다.
 '혼자서 좋아해도 괜찮다면 그러고 싶었는데.'
 깨닫지 못한 사이 주르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생각보다 그를 많이 좋아했던 모양이었다. 고백도 제대로 못해보고 끝난 짝사랑이 너무나 비참하게 느껴져 설종은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흐으흑! 바보 같이, 흑. 훌쩍!"
 벽으로 얼굴을 돌린 채 흐르는 콧물과 눈물을 닦으며 어깨를 들썩일 때, 비상구 문이 살짝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놀라서 얼른 눈물을 훔친 그녀는 그 사람이 그냥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벽에 머리를 묻고 바짝 붙어있었다. 그런데 천천히 다가온 그 사람은 설종의 어깨에 묵직한 손을 얹었다.
 설종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니 치프 경진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녀의 눈동자와 빨갛게 부어 버린 코끝을 보던 그가 작게 한숨을 삼켰다. 뭐라 또 야간을 칠 줄 알았던 설종은, 생각밖에 그가 자신의 어깨를 살짝 끌어당겨 제 품에 기대게 해 주자 어쩔 줄 몰라 했다.
 '이 인간이 돌았나?'
 불안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설종은 몸을 뒤로 확 빼며 그에게 안기지 않으려 반항했다. 그러자 낮고 부드러운 저음으로 그가 중얼거렸다.
 "내가 좀 심했나 보다. 그만 울어."
 그러자 설종은, 아까 그가 했던 꾸중으로 자신이 운 것이라 경진이 착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본의 아니게 그를 속인 꼴이 되어버린 설종은 어쩐지 묘한 죄책감이 들어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렇다고 지금 치프에게, 사실대로 다 풀어냈다간 그대로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기에 함부로 입을 놀릴 수도 없었다.
 그렇게 죄책감과 당황스러움에 머뭇거리는 사이 결국 경진의 힘센 팔이 이끄는 대로 주춤주춤 끌려간 설종은 그의 품에 가만히 안겼다. 그의 긴 팔이 설종의 어깨를 감싸 안은 순간, 항아가 했던 말이 그녀의 머리에 떠올랐다.

 '치프는 널 좋아해.'

 '정말일까? 정말 이 사람이 나를.....'
 의구심이 가득한 설종의 몸은 바짝 긴장하여 딱딱하게 굳어있었지만 어깨에 와 닿은 그의 팔은 무척이나 부드럽고 또 다정했다. 그가 말없이 자신을 위로하려 한다는 것을 깨닫자 그녀의 긴장도 차차 풀어졌다.
 양간 마른 편이었지만 경진의 가슴은 의외로 굉장히 넓고 단단했다.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있으려니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가슴 속에 뜨겁게 끓어오르던 덩어리들이 스르르 녹는 느낌이랄까. 아까 준우의 말로 인해 받았던 마음의 충격까지 치유되는 착각이 일었다. 설종은 서서히 마음을 놓고 경진의 품에 푹 안겨 가늘게 어깨를 떨며 작게 흐느끼고 있었다.
 "흑!"
 소리죽여 울먹이는 그녀의 떨림이 가슴으로 전해질 때마다 경진의 마음도 따라 울렁거렸다. 설종이 울상이 되어 의국을 뛰쳐나간 것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터였는데, 이어 들어온 동욱이 그녀가 울며 비상구로 뛰어갔다는 말을 했을 때는 사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최소한 의국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경진의 표정만큼은 태연하기 짝이 없었지만, 마음은 온통 비상구에서 울고 있을 그녀에게 가 있었다.
 하던 일을 마무리해놓고 다른 곳에 가는 척 조용히 의국을 나왔지만 비상구로 걸어가는 그의 발걸음은 급하기만 했다. 결국 이곳에서 흐느끼고 있는 설종을 발견하자 자기도 모르게 안아버린 것이었다. 작은 키의 그녀가 훨씬 큰 그에게 안기자 품 안에 쏙 들어왔다. 상상해왔던 것보더 더 가녀리고 나긋한 몸이었다.
 그의 시선에 설종의 하얀 목덜미가 들어왔다. 언젠가 그의 손끈으로 만져본 적이 있던 곳이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 말랑하던 그 살결. 그 기억을 떠올리자 경진의 손가락 끝이 따끔따끔 저려왔다. 다시금 만져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거기에 뜨거운 입술을 대고 혀로 핥아 맛볼 수만 있다면. 그런 상상을 하자마자 피가 뜨겁게 데워졌다. 목 안이 뻣뻣이 말라갔다.
 그가 그토록 강한 욕구와 싸우고 있을 때, 어느 정도 진정이 된 설종이 고개를 들며 경진의 가슴을 두 손바닥으로 살짝 밀었다. 그렇게 그는 밀려나고 말았다. 설종은 그와 시선을 부딪치지 않고 꾸벅 인사를 한 뒤 비상구 문을 열고 나갔다. 그녀가 사라진 뒤에도 경진은 한참이나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루 온종일 바빴다. 설종은 치토스의 결혼 소식으로 약간 우울하긴 했지만 그런 마음을 떨치려 일부러 일에 집중하니 나중에는 할 일이 없어 한가함을 느끼기도 했다. 저녁 회진을 마치고 나니 오늘 밤은 당직이 없는 오프였다. 밀린 잠이나 잘까 하고 터벅터벅 걷는데 뒤에서 권 교수가 그녀를 불렀다.
 "김 선생!"
 "네, 교수님."
 "어제 응급실에서 우리 어머니 봐준 거 고마웠어. 김 선생이 친절히 잘해 주더라며 어머니께서 무척 좋아하시더라고."
 "그러셨어요? 별로 해드린 것도 없는데."
 설종은 멋쩍음에 배시시 웃었다. 나이가 지긋하신데다 성품이 원만한 권 교수를 설종은 무척 존경하고 있었다.
 "오늘 저녁 혹시 오프야?"
 "네."
 "그럼 김 선생 수고하는데 내가 밥이나 사지."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오늘 복날이기도 하고, 이런 때 잘 먹어둬야 여름 잘 나지. 옷 갈아입고 현관으로 나와."
 권 교수가 그녀의 어깨를 툭 치며 권했다. 우울해서 별로 외출하고 싶지 않았지만 끝까지 사양하기는 어려운 분이라 어쩔 수 없었다. 가운을 벗어두고 가벼운 화장을 한 뒤 외출복으로 갈아입는데 오늘 당직인 항아가 밥을 먹고 올라왔다.
 "쫑, 외출해?"
 "어."
 "맛있는 거 먹고 와! 힘 좀 내고."
 아까 점심시간에 준우의 약혼 소식에 대해 말해 주어선지 항아가 위로의 말을 던졌다. 설종은 피식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고 숙소를 나섰다. 그녀가 현관으로 내려가는데, 멀리서 권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는 치프가 보였다. 순간 설종의 가슴이 뜨끔했다. 아침에 비상구에서 그에게 안겼던 일이 생각이 났기 때문이었다.
 '미치겠네. 왜 바보같이 거기서 울고 있어가지고.'
 설종은 스스로를 원망하며 권 교수에게 쭈뼛쭈뼛 다가갔다. 그녀를 본 권 교수는 빨리 오라는 손짓을 하더니 뒤돌아 택시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그의 뒤를 설종과 치프가 따라갔다.
 '같이 가는 거야? 치프랑?'
 설종이 놀라는데 이미 택시 앞문을 열고 타던 권 교수가 재촉했다.
 "뭐하나, 두 사람 빨리 와!"
 경진이 성큼성큼 걸어가 택시를 타자 설종도 침을 꿀꺽 삼키고 그의 옆자리에 올랐다. 식당으로 가는 길, 교수와 치프는 어떤 환자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설종의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지 않으려 해도 자꾸 옆자리의 경진이 의식이 되어서였다. 그의 굵고 낮은 저음이 택시 안을 울릴 때마다 설종의 가슴도 따라 설렜다.
 아까 비상구에서 다정하게 그녀를 안아주던 그의 손길과 가슴의 촉감이 자꾸만 되살아났다. 그의 가슴에서 맡았던 은은한 스킨향이 택시 안을 떠돌다 희미하게 그녀의 코끝에 전해지자 아랫배가 찌르르 떨려왔다. 설종은 잡생각을 쫓으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저 인간에게 정욕을 물씬 느끼다니! 인생 막장이로고!'
 식당에 도착하자 권 교수가 앞장서서 들어갔다.
 "이 집이 서울에서 제일 맛있는 집이야. 어서 들어와."
 문패도 없고 간판도 없는, 약간은 낡은 집인데 서울에서 제일 맛있다니. 의아함에 설종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대놓고 물을 수도 없는 은사님이라 그녀는 쫄래쫄래 두 사람을 따라 들어갔다.
 메뉴판도 없고 가격도 없었지만 대충 권 교수가 알아서 탕과 수육을 시켰다. 어딘가 재미있어 보이는 권 교수의 눈빛을 보고 그때쯤 눈치를 챘어야 하는데 설종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곧 나온 수육을 먹으면서도 고기가 무척 쫄깃하고 맛있다고 느꼈을 뿐, 별다른 생각을 못했다. 얼큰한 탕까지 다 먹고 기분 좋게 식당을 나왔을 때, 권 교수가 두 사람은 어디로 갈 거냐고 물었다.
 "저는 병원에요."
 설종이 대답하자 경진도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병원에 잠시 가 봐야 합니다."
 "그래? 그럼 나 먼저 집으로 가지 자네가 김 선생과 함께 병원으로 가면 되겠구먼. 자, 김 선생. 나한테 얻어먹었다고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말아요. 우리끼리 비밀로 하자고."
 그렇게 권 교수가 먼저 택시를 타고 사라지자 두 사람만 남았다. 어쩐지 어색한 기분이 들어 설종이 그의 눈치를 보는데 문득 경진이 그녀에게 물었다.
 "오늘 뭐 먹은 건지 알아?"
 "네?"
 설종이 두 눈을 깜빡거리자 경진이 갑자기 피식 웃었다. 입매를 보기 좋게 올리며 씨익 웃는 그 얼굴에서 이상하게 눈을 뗄 수 없던 설종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신탕."
 "네에?"
 "권 교수님 낙이야. 1년차 선생들 감쪽같이 속이고 먹이는 거. 속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지. 반 선생한테는 말하지 마. 중복 때 아마 데리고 가실 거야."
 "하, 어떻게....."
 설종은 제 입을 손바닥으로 꾹 막으며 경악했다. 아직까지 그녀의 위 속에서 꿈틀거릴 고깃덩이를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말을 잇지 못하는 설종을 흘끔 넘겨다 본 경진이 옆에 있는 카페를 턱으로 가리켰다.
 "차나 한 잔 마시러 가지."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뚜벅뚜벅 걸어갔지만 설종은 여전히 제 입을 꼭 막고 있는 상태였다. 손을 떼면 그대로 토할 것 같았다.

 "정말 권 교수님 그렇게 안 봤는데. 이중인격 아니에요?"
 차가운 아이스커피를 벌컥벌컥 마시더니 설종이 억울한 듯 내뱉었다. 경진은 가타부타 대꾸가 없었다. 설종은 울상이 된 얼굴을 두손으로 가렸다.
 "정말 미안해. 난 너희들 먹을 생각 없었어."
 설종의 울먹이는 소리를 듣고 경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어지간히 충격적인 모양이었다.
 "치프 샘은 알고 있었죠, 그치요?"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설종이 눈을 하얗게 뜨며 경진을 쏘아보았다.
 "그럼 눈치라도 좀 주시던가!"
 "뭐 하러."
 "네?"
 "알았으면 피차 피곤했을 거야. 먹고 싶지 않아도 먹어야 했을테니."
 하긴, 은사님이 사주는 음식인데, 싫다고 대놓고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의 말대로 만약 설종이 그 사실을 알았더라도 울며 겨자 먹기로 먹는 척이라도 해야 했을 것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모르고 맛있게 먹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설종의 어깨가 축 처졌다.
 "사회생활 참 힘드네요."
 "이 정도 가지고 뭘. 어쨌든 맛있는 음식 사주려 하신 거잖아. 좋게 생각해."
 "좋은 게 좋은 거다.......어렵네요."
 설종이 어쨌든 수궁하자 경진이 슬그머니 입매를 끌어올렸다.
 "반 선생한테는 귀뜸해줄 거야?"
 ".....걱정 마세요. 걔는 엄청 좋아해요. 몸 약하다고 어릴 때부터 철마다 집에서 먹였대요."
 의외의 사실에 경진의 눈이 약간 커지더니 웃음이 진해졌다. 설종은 겸연쩍어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다.
 "항아라도 교수님 물 먹였으면 좋겠네요. 진짜 미워."
 "맛은 어땠어?"
 그가 한 손으로 턱을 괴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카페의 조명에 비치는 그의 눈동자가 오묘한 빛을 발했다. 설종은 눈을 깜빡이며 그것을 바라보다 헛기침을 했다.
 "괜찮았어요. 그냥 육개장이었다고 생각할래요. 근데, 샘."
 "왜?"
 성종은 침을 꿀꺽 삼키고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가 조심히 말을 꺼냈다. 화내면 어쩌지.
 ".....안경 한 번 벗어 보시면 안 돼요?"
 "뭐?"
 경진의 몸이 살짝 뒤로 젖혀졌다. 그녀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설종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할 말을 골랐다.
 "저기, 눈동자 색깔이 좀 특이해서......정말 예뻐요.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자세히 보고 싶어요."
 경진은 이마를 살짝 찌푸린 채로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설종이 가슴에 손을 모으고 애원까지 했으나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싫어."
 경진이 그녀를 외면한 채로 차갑게 대답하자 설종은 괜한 소리를 해 그를 화나게 만들었나 싶어 후회했다. 그가 계산서를 들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설종도 그를 따라 풀이 죽은 모습으로 일어섰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걱정이 무색하게, 앞서 가는 경진은 뺨이 살짝 붉어진 것이, 화가 난 것이라기보다는 쑥스러워 어쩔 줄 몰라하는 바로 그것이었다.
 찻집을 나와 큰길가로 걸어가는데 설조의 가방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얼른 액정을 꺼내 확인하니 집이었다. 설종의 얼굴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는데 계속 울리는 벨소리를 듣고 치프가 의아한 눈빛을 했다. 할 수 없이 몸을 돌리며 조금 떨어져 폴더를 열었다.
 "네."
 [여보시오.아가! 쫑이냐?]
 "잉. 엄니가 웬일이셔잉?"
 [아가, 느가 느무 보고 싶간디, 시방 뭐땀시 전화를 안 허는 것이여?]
 "허이고, 엄니는. 나도 보고 싶지럴. 근디 나가 월매나 바쁘간디. 집구석일랑 무탈하시고잉?"
 구수하게 펼쳐지는 사투리에 저절로 경진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정감 있고 부드럽게 이어지는 그녀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푸근하게 들렸다.
 "시방 선이라고라? 아, 결혼은 또 뭣허게!"
 순간 경진의 고개가 살짝 들리며 턱 끝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저절로 통화내용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아가, 이번에도 도망가믄 느그 오빠더러 쫓아가서 잡아오라 헐텐게, 느는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야.]
 "흐미, 결혼 생각이 아직 없다고 그렇게 말했간디, 나가 엄니땀시 살 수가 없당께! 암튼 끊소잉."
 설종이 잔뜩 찡그린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몸을 돌려 치프를 보니 그는 긴 손을 뻗어 택시를 잡고 있었다. 그렇게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오는 내내 그는 말이 없었고 덕분에 그녀는 무척이나 어색한 시간을 참아내야 했다.

 오프를 받고 외출을 했던 항아는 갑작스레 내린 소나기에 발이 묶여 가게 처마 밑에 서 있었다. 병원이 저 멀리 언덕 위에 보였지만 이 비를 다 맞고 갈 순 없었다. 세찬 빗줄기만 잦아들면 뛰어가리라 생각하고 지루하게 기다렸다. 건너편 커피숍이라도 가서 시간을 죽일까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반 선생?"
 놀란 그녀가 고개를 들어보니, 동욱이 우산을 삐딱하게 든 채로 항아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어머, 샘."
 "누구 기다려?"
 "아니오. 비가 많이 와서, 먼저 가세요. 좀 있다 갈게요."
 "같이 쓸래?"
 동욱이 우산을 세우며 그녀에게 물었다. 시알리스 항아는 조금 머뭇거리다 사양을 했다.
 "괜찮아요."
 "일행 없으면 같이 가. 이리 와."
 그가 다가와 우산을 씌워주자, 그녀는 못 이기는 척 동욱의 옆으로 갔다. 비 내리는 거리를 그와 함께 천천히 걷는데, 바닥을 맞고 튀어 오른 빗줄기가 그녀의 바지자락을 적셨다. 그러자 동욱이 그녀쪽으로 조금 더 우산을 넘겼다. 항아가 미안한 듯 우산대를 밀었다.
 "샘, 그쪽 어깨 다 젖어요. 같이 써요."
 동욱의 왼쪽 어깨는 이미 푹 젖어 있었다. 그러나 동욱은 피식 웃으며 한 손으로 항아의 머리르 부비부비 쓰다듬었다.
 "반 선생, 순진하구나. 이럴 때는 그런 말보다 팔짱을 끼면서 좀 더 가까이 들어오는 게 늑대에 대한 예의야."
 "네에? 아하하하하."
 항아는 그의 바람대로 팔짱을 끼지는 않았지만 동욱에게 바짝 붙어 걸었다. 덕분에 아까보다는 조금 덜 비를 맞게 된 두 사람은 마치 다정한 연인들처럼 사이좋게 한 우산을 쓰고 병원으로 이어진 언덕길을 올라갔다. 둥근 우산 아래 마주한 두 사람의 어깨가 뭐라 서로 속살거려는 듯 붙였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녀의 정신시계 #4 (골 때리게 사랑스런 그대.)

아침 컨퍼런스 시간.
 어젯밤 늦게까지 심전도 리포트를 위해 책을 읽은 데다 새벽부터 일어나 자체 회진을 하러 병실을 돌아다니다 보니 설종은 쏟아지는 잠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앞에서 발표하는 영식의 얼굴을 죽일듯 노려보아도 자꾸 내려오는 눈꺼풀을 들어올리기엔 역부족이었다.
 "본태성 고혈압의 경우는 그 치료법이..........."
 영식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모차르트의 자장가보다 더 감미롭게 들렸다. 설종은 졸지 않으려 볼펜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쿡 쑤셨다. 잠시 정신이 든다 싶었는데 순간 몸이 아래로 휘청거렸다. 하마터면 책상에 머리를 박을 뻔했다.
 '아 씨, 또 졸았네.'
 설종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비비며 정신을 차리는데, 옆에 앉은 항아가 땅에 떨어진 펜을 줍는 척 하며 그녀에게 속삭였다.
 "치프 눈치 장난 아니다. 눈 좀 떠."
 그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설종이 눈을 크게 뜨고 치프가 앉은 곳을 흘끔거렸다. 입술까지 앙 깨물고 자신을 노려보는 경진을 본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더니 정말로 잠이 싹 달아나 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허리르 펴는데 갑자기 성이 확 났다.
 '저 인간은 앞에서 발표하는 영식이 얼굴 안 보고 내 얼굴을 보고 지랄이야, 지랄이!'
 그렇게 욕을 하면서 잠을 쫓은 설종은 컨퍼런스가 끝나자 최대한 조심해 일부러 치프가 없는 쪽으로 걸어가며 안 붙잡히고 강의실을 벗어나려 머리를 굴렸다. 잡히면 또 한 소리 들을 것이 뻔했다. 다행히 제일 먼저 강의실 문을 열고나오니 다들 그녀를 따라 우르르 밖으로 나왔다.
 뒤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시선에 뒤통수가 따가웠지만 설종은 두 눈 딱 감고 모른 척 발걸음을 재빨리 옮겼다. 그런데 그녀가 내과 병동에 거의 도착했을 때, 갑자기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 세 명이 그녀의 앞을 척 막아섰다. 놀란 그녀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김설종 선생님 되십니까?"
 "네? 네. 그런.....데요."
 "여기."



 그들이 내민 것은 엄청나게 큰 꽃다발이었다. 설종은 황당한 표정으로 커다랗게 뜬 눈동자만 깜빡였다.뒤에서 그 상황을 지켜보는 내과 의국원들도 낮게 술러이며 궁금해 하고 있었다.
 "이, 이게 뭐예요?"
 "생명의 은인이신 김설종 선생님께 저희 형님께서 보내시는 핏빛처럼 붉은 장미입니다. 받아 주십시오."
 "받아 주십시오."
 뒤에 있던 두 남자가 머리를 확 숙이며 그 말을 복창했다. 몇 백송이는 되어 보이는 장미 꽃다발이 눈앞에서 어른거리자 설종은 할 말을 잊었다. 그러나 일단 그녀는 복도 한쪽으로 빠졌다. 뒤에서 오시는 교수님들의 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비켜나자 다들 한 번씩 설종을 흘끔거리며 지나갔다. 아침부터 이게 웬 망신인지.
 "저기, 형님이라니오?"
 "응급실에서 저희 형님을 살려 주신 것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왜, 팔에 칼 맞아서 오신........."
 설종의 두 눈이 깜빡깜빡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응급실에서 치토스가 조폭에게 슈처를 해 주었던 게 기억이 났다.
 "전 한 일이 아무것도 없는데. 아무튼 저는 지금 굉장히 바쁘거든요? 일단 스테이션에 맡겨 주실래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나중에라도 저희 형님 병실에 꼭 들러 주십시오."
 그렇게 맡기고 간 꽃다발은 회진을 마치고서 설종에게 다시 안겨졌다. 꽃다발 옆에 달린 편지봉투을 설종이 집어 들자, 옆에 있던 진우, 영식, 항아는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꼭 그 내용을 알고야 말겠다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다.
 "읽어봐. 빨리."
 그러나 편지를 눈으로 훑어 내리던 설종은 반도 못 읽고 덮어 버리고 말았다.
 "됐어. 버려."
 그러나 그녀의 손 안에서 구겨지는 편지를 그냥 두고 볼 세 사람이 아니었다.
 "좀 보자니까, 어서 이리 내! 야, 뺏어!"
 "왜 이래! 안 돼애!"
 설종이 몸부림쳤지만 세 사람은 협공으로 기어이 그 편지를 빼앗았다. 설종을 피해 병동 구석으로 멀리 뛰어간 진우가 종이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야, 빨리 안 가져와?"
 편지에 쓰인 글귀를 읽던 진우가 갑자기 그 자리에 푹 쓰러지더니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웃기 시작했다.
 "우하하하! 우하하하하하! 큭큭큭! 어허, 어헉! 수, 숨을 쉴 수가..........."
 "왜, 왜?"
 "내가 먼저야! 대체 뭐라고 썼기에......"
 "이것들이, 죽을래?"
 그렇게 편지를 돌려본 항아와 영식은 진우와 똑같이 기절하며 쓰러졌고, 동기들은 그날 내내 설종과 부딪힐 때마다 그녀를 놀렸다.
 "설종씨를 처음 본 순간 뒤통수에 망치로 퍽치기 당한 아찔함을 느꼈습니다!"
 "야!"
 "삭카린을 국자로 떠먹어도 그대의 목소리보다 달콤하겠습니까?"
 "이것들이 진짜!"
 "불타는 이 마음을 접수해 주신다면 그 기쁨에 제 붉은 창자를 끄집어내 줄넘기라도 펄쩍펄쩍 뛰겠습니다."
 "죽는다, 그만 해라잉?"
 설종이 이를 드러내며 위협했지만 먹힐 리가 없었다. 항아와 진우는 완전히 신이 났다.
 "아구창을 갈겨서 이빨이 싸그리 아작이 나더라도 그대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졸라게 귀여운 나의 설종 씨!"
 "캬아! 문장력이 장난 아니다. 절절한 마음이 전해진다. 안 그러냐?"
 "골 때리게 사랑스런 그대여는 어떻고! 주옥같은 문장이다. 정말."
 "어우,씨!"
 결국 설종은 세 사람을 피해 당직실을 나가고 말았다. 요즘 되는 일도 하나도 없는데 별 희한한 것들이 그녀에게 태클을 걸어왔다. 사는게  너무 힘든 그녀였다.

 여느 날보다 환자가 적어 조금 한가한 오후. 설종과 항아는 자영이 근무하는 내과 워드에 앉아서 커피를 얻어 마시며 심각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오늘의 주제는 '이 병원에서 어떤 넘이 가장 섹시한가' 였다.
 "당연히 정형외과 치프 장인하 샘이재. 얼굴이랑 몸 봤나? 완전 직이준다. 장난 아이거든?"
 자영이 엄지를 세우며 단언하듯 말했다. 그의 외모가 완벽하단 사실에는 항아와 설종도 이견이 없었다.
 "잘생기긴 했지. 근데 침대에선 어떨까? 의외로 그런 타입이 정력이 약할 수도 있다더라."
 장인하가 들었으면 거품을 물고 덤빌 소리였지만 없는 데서는 나라님도 욕한다고 했다.
 "에이, 정형외과가 얼마나 힘이 좋은데. 그것보다는 마취과 환화림 선생이 장 치프랑 사귄다던데?"
 "한 선생이 혼자 좋아하는 거야. 장 치프는 여자한테 관심 없어. 그것만 봐도 하체가 부실한 게 틀림없어. 패스!"
 "카면 반, 니는 누가 최고로 섹시하단 말인데?"
 "음........우리 치프 샘 목소리가 끝내주지. 그런 목소리로 내 이름 불러주면 순식간에 아래가 젖어버릴거야."
 "게토레이? 시방 야가 환장을 했나.개또라이랑 뭔 짓을 하겠다고."
 "놔 도라. 저 가스나 저거는 목소리 섹시한 남자한테 젖어든다 아이가."
 "허따, 그래서 반, 너는 게토레이하고 거시기를 헐 수 있을 것 같냐?"
 "못 할 것도 없지?"
 "이런 미친!"
 설종이 질렸단 표정으로 몸을 뒤로 젖혔다. 다른 놈도 아니고 박경진과 그럴 생각을 하다니, 진정한 시대의 반항아였다. 그때 스테이션의 내선 전화가 크게 울리자 자영이 몸을 돌려 얼른 수화기를 들었다.
 "네, 901워드 차지 문자영입니다..........네"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말에 귀를 기울이던 자영이 눈을 돌려 설종을 흘끔 보았다. 그 시선에 긴장한 설종이 눈을 크게 뜨며 엉덩이를 슬그머니 들었다.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자영이 몸을 세우더니 설종을 보고 혀를 쯧쯧 찼다.
 "니 죽었다."
  설종이 울먹였다."
 "또 왜에?"
 "내과 치픈데 니 당장 의국에 오란다. 엄청 화난 목소린데?"
 "의, 의국?"
 다른 곳도 아니고 의국이란 말에 설종이 몸서리를 쳤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마주 쥐어 가슴에 대고 발을 동동 구르며 항아를 보았다.
 "왜 , 왜 부르는 걸까?"
 "모르지. 뛰어 가면서 잘 생각해 봐."
 "어허헝! 내 팔자야!"
 설종이 엘리베이터로 사라지자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항아가 의구심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치프가 유난히 쫑을 갈구네?"
 "그래 말이라. 아를 완전 쥐 잡듯이 잡네. 사실 쫑이보다 훨씬 못하는 것들도 쌨는데."
 그 말에 어딘가 불편한 표정으로 항아가 자영을 보았다.
 "그거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야?"
 "그런 뜻은 아인데, 찔리면 뭐 할 수 없고."
 태연하게 자영이 받아치자 항아가 눈을 하얗게 뜨고 그녀를 째려보았다.

 헐레벌떡 의국으로 뛰어가던 설종은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아가며 체크를 했다.
 "차트.....좀 밀렸고, 검사지.....정리했고, 헉헉! 스케줄 표도 했고. 뭐지? 차트 때문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수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 드디어 지옥의 문 앞에 선 설종은 심호흡을 몇 번 한 뒤 두려운 마음으로 노크를 했다. 똑똑 소리가 무슨 굉음처럼 크게 들렸다.
 "들어 와."
 '미친 년. 저렇게 음산한 목소리가 어디가 섹시한 거야? 섹시가 지난 겨울에 다 얼어 죽었나?'
 애꿎은 항아를 욕하며 그녀가 쭈뼛쭈뼛 의국으로 들어가자 책상에 앉아 컴퓨터 모니터를 보고 있던 경진이 몸을 돌렸다. 의자에서 쭉 뻗은 그의 다리가 엄청나게 길었다. 설종은 꾸벅 인사를 했다.
 "샘, 부르셨습니까?"
 "김설종."
 "네, 샘."
 "너 916호 CRF 정진화 환자 주치의지?"
 설조으이 머리가 마구 돌아갔다. 몇 번 눈을 깜빡이다 번쩍 정신이 든 그녀는 심장이 툭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아침에 치프가 분명히 I&O 체크 오더 내라고 했는데 잊었다. 설종은 죽었다 싶은 생각에 차라리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이제 왜 불렀는지 알겠나?"
 ".......네."
 모기 소리만큼 작게 대답하며 설종은 이제 곧 뭔가가 날아오리라 생각하며 각오를 단단히 했다. 카운트다운, 텐, 나인, 에잇........
 "너는 대체!"
 '스타트!'



 설종이 고개를 팍 숙이는데 갑자기 의국 문이 벌컥 열리더니 동욱이 불쑥 들어왔다. 그는 화난 표정의 경진과 기가 팍 죽은 설종을 번갈아 보더니 들고 있던 책을 탁자 위에 텅 던지고 끼리릭 의자 끌리는 소리를 내며 중간에 떡하니 앉았다.
 "분위기가 왜 이러냐? 너 또 쟤 까는 중이었어?"
 동욱이 따지듯 묻자 뭐라 할 듯 입술을 달짝이던 경진이 몸을 뒤로 젖히고 의자에 푹 파묻혔다. 경진이 한 손을 내저으며 설종을 물리쳤다.
 "김설종, 그만 가 봐. 제발 정신 좀 차리고."
 "네, 그럼."
 천만다행으로 동욱이 끼어들어 대형 참사를 면한 설종은 의국을 나오는 순간 표정이 돌변하면서 희열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양팔을 쭉 펼쳐 하늘을 받치며 자비로운 신께 감사했다.
 "으아, 신이시여, 저를 버리지 않으셨군요. 살다보니 이렇게 날로 먹을 수도 있었네요. 권동욱 샘, 복 받으실 거예요! 장가갈 때 축의금 왕창 넣어 드릴께! 아싸! 음미 좋은 거!"
 그렇게 설종이 펄쩍펄쩍 뛰면서 룰루랄라 사라진 뒤에도 의국안의 동욱은 여전히 묘한 눈빛으로 경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봐."
 경진이 퉁명스레 한마디 했지만 동욱은 빤히 그를 살피며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어떻게 보면 잘생긴 것 같기도 하고..........너 나 몰래 쟤 앞에서 웃어 준적 있었냐?"
 "뭐?"
 "어떻게 꼬였어? 방법이나 좀 알자."
 "대체 무슨 소리야? 뭐 잘못 먹었어?"
 경진이 이마를 찌푸리자 동욱은 졌다는 듯 양 손바닥을 내보이며 고개를 돌렸다.
 "쟤가 너 좋아한단다."
 "뭐라고?"
 "입국식 날, 룸살롱에서 펑펑 울더라. 네가 너무 좋은데 안 받아줘서 힘들다고. 자식아! 불쌍한 애 좀 그만 괴롭혀. 어유, 복 터진 놈!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을 싸는 구나."
 동욱은 억울한 표정으로 경진의 다리를 걷어찼다. 더욱 황당한 표정으로 경진이 동욱을 올려다봤다.
 "지금 김설종 말하는 거야?"
 "그럼 누구겠냐? 나쁜 놈! 인턴 때부터 널 짝사랑했다더라. 왜, 좋냐?"
 갑자기 경진의 말문이 턱 막히더니 가슴이 조여 오며 관자놀이가 확 붉어졌다. 경진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안경을 밀어 올리며 눈을 깜빡였다. 속에서 열이 확 치받는 느낌이었다. 달아오른 경진의 얼굴을 본 동욱이 한쪽 입술을 들어 올리며 씨익 비웃었다.
 "몰랐겠지. 알았으면 그렇게 못 갈구지. 이젠 좀 봐 줘라. 애가 가엾지도 않냐?"
 "그럴 리가 없어. 네가 잘못 알았겠지."
 "어쭈? 제법 뺄 줄도 알고."
 경진은 더 이상 동욱의 헛소리를 상대하고 싶지 않은 듯 몸을 돌려 컴퓨터 마우스를 잡았다. 그런 그의 뒤통수에 대고 지친 목소리로 동욱이 중얼거렸다.
 "그래, 그래. 내가 잘못 들었다고 하자. 그러고 싶으시면 그러시던가. 마음대로 하세요!"
 동욱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섬주섬 책을 주워 들고 의국 안쪽 침실로 걸어갔다. 문손잡이를 돌리는데 경진의 중얼거림이 그의 발목을 낚아챘다.
 "..........장난치는 거면 죽을 줄 알아."'
 그 말에서 느껴지는 험한 살기에 동욱의 눈썹이 위로 치떠졌다.
 '자식이, 진심이구나.'
 그는 풀기 없는 헛웃음을 웃었다. 그러나 동욱이 뒤돌아 경진을 마주했을 때는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본인한테 직접 들었어. 필요 없으면 말해. 내가 가진다."
 동욱의 선언을 듣는 순간, 경진은 가슴 아래 부분이 날카롭게 후벼지는 착각을 느꼈다. 대부분의 삶을 장난기로 채우는 동욱이지만 아주 드물게 진지해질 때가 있었고 그것이 바로 지금이었다. 그의 말이 전하는 의미를 머릿속으로 이해하려 애쓰며 경진은 동욱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야. 내가 시작해도 상관없는지 묻고 있는 거라고."
 "너, 설마?"
 "그래. 네 생각대로야. 말해. 건드리지 말라면 그래 주지."
 도전하는 듯한 동욱의 눈빛에 경진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이성은 백 번이고 '상관없다' 소리치라고 그를 윽박질렀지만 이상하게 입 안의 혀가 움직여지질 않았다. 경진의 복잡한 시선을 마주하던 동욱은 잠시 후 시선을 아래로 피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뭐, 싫지 않으면 좀 잘해 주던가. 알다시피 힘들때잖아? 어설퍼 못 봐주겠으면 붙잡고 제대로 가르치든가. 무조건 억누르지만 말고."
 그리고는 동욱이 침실의 문을 열었다. 한 걸음 내딛는데 경징의 날선 목소리가 그의 등을 후려갈겼다.
 "상관없어."
 그 말을 듣고도 동욱은 잠깐 주춤했을 뿐, 이윽고 말없이 침실로 들어갔다. 책을 그곳에 놓아두고 밖으로 나온 동욱은 주머니의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하늘에 뜬 구름이 흐르듯 밀려갔다. 점점 타들어 가는 담배 끝을 검지로 튕긴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바보 같은 자식, 결국 못 빠져나오는 거냐?.......불쌍한 놈."
 언뜻 그의 눈동자가 물기로 흐려졌다.

 경진은 아무도 없는 의국에 앉아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뭔가 동욱이 자신을 급하게 떠밀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동욱의 마음을 헤아리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동욱이 설종을 마음에 두었다면 그에게는 자신이 걸림돌이 될 터이니 이 순간 결정을 강요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경진으로선 그럴 수밖에 없는 대답이었는데도 이상하게 까닭 없는 분노가 그의 가슴 속에서 울컥 치밀었다. 여태 설종을 어찌해 보겠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니지만 두 사람이 나란히 선 모습을 상상하는 건 그의 기분을 어쩐지 불쾌하게 만들었다.
 문득 그는 자신이 아까부터 계속 같은 페이지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몇 페이지 전부터의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더불어. 그는 한숨을 쉬며 컴퓨터를 꺼버렸다.
 그가 지금 가진 감정의 그릇.
 그 방향을 어디로 향해 쏟아 부을지를 결정해야 할 때가 왔다. 동욱의 앞에서는 상관없다 말함으로써 그 그릇을 집어던져 와장창 깨어 버린 격이 되었으나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이미 그는 그 깊은 물에 잠겨 허우적대며 괴로워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구질구질한 건 질색이었다. 지금이라도 깨끗이 손을 털고 가버리고 싶었으나 늪과 같이 질척이는 기묘한 설렘이 그를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새카만 유리처럼 빛나는 설종의 눈동자가 떠오르자 그의 가슴이 순간 검은 파도처럼 높이 일러였다.
 경진은 피곤한 기색으로 의자에 목을 젖히고 누웠다. 어둠 속에 잠긴 그의 눈빛은 짙게 가라앉아 있었으나, 경진은 자신의 마음 깊은 심연에 감춰진 은밀한 결정을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저녁 시간, 설종은 내과중환자실에 앉아 검사지를 정리하고 있었다. 오늘 그녀는 중환자실 당직이었다.
 "아까 ABGA 수치가 어떻게 되더라........? 여기 있구나."
 중얼중얼 입으로 숫자를 외며 부지런히 적어대는데, 머리 위에서 간호사가 그녀를 불렀다.
 "김 선생님. 정현식 환자 Subclavian vein(쇄골하 정맥)에 CVC insertion 오더 있는데요?"
 "그래요?"
 설종은 차트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준비 좀 해 주실래요? 저 손 씻고 올게요."
 "네."
 설종은 중환자실 옆에 마련된 개수대에서 소독비누로 손을 깨끗이 씻었다. 쇄골 정맥에 카테터를 넣는 일은 고도의 테크닉이 요구되는 시술이었고 완전한 멸균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설종이 손을 씻고 오자 간호사가 멸균 타올을 내밀었다. 손을 닦고 마스크 쓰고 수술복까지 갖춰 입은 그녀는 베타딘 코튼 볼로 환자의 쇄골 부분에 소독액을 펴 바른 뒤 소독포를 펼쳤다.
 "리도카인(lidocaine)."
 마취제를 주사하고 손가락으로 꼭꼭 누르는데 누군가 환자의 침대로 다가왔다. 그것이 치프 경진인 것을 알자 설종은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 시간에 중환자실에는 웬일일까?
 "샘, 왜.......?"
 "계속해."
 경진이 턱짓을 했지만 순식간에 마음의 평화를 잃은 설종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머뭇거렸다. 요즘은 사실 치프 목소리만 들어도 오금이 저렸다. 어찌나 갈궈 주시는지 말이다. 카테터를 쇄골 정맥으로 쓱쓱 끼워 넣는데 자꾸 그의 눈치를 살피게 되었다.
 "왜 그리 손을 떨어?"
 "보시니까.........떨려서."
 '알아서 꺼지란 뜻이다, 새꺄! 네놈은 눈치라곤 개똥만큼도 없냐?'
 설종이 속으로 악을 썼지만 치프는 작정하기라도 한 듯 움직일 생각이 없어보였다. 결국 눈치 줘서 쫓아내기를 완전히 포기한 그녀는 아예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카테터 삽입에만 집중했다. 멸균 장갑 안에 싸인 설종의 가늘고 섬세한 손가락이 움직이는 곳마다 경진의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다녔다.
 "헤파린(heparin)."
 혈전을 예방하는 약을 넣어주고 넓은 반창고를 붙여준 뒤 설종은 장갑을 벗었다. 겨우 1,20여 분에 불과한 시간이지만 몇 시간 수술보다 더 긴장했다. 맞는 위치에 제대로 들어갔는지 확인하기 위해 포터블 엑스레이까지 찍고 나서야 카테터 삽입이 완전히 마무리가 되었다. 잠시 후 경진이 엑스레이 사진을 보고 있는 곳으로 슬그머니 다가간 설종이 고개를 쓱 들이밀었다.
 "어때요?"
 "제대로 들어갔어. 잘했어. 이렇게 하면 돼."
 치프가 고개를 끄덕이자 설종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시방 이 인간이 칭찬을 해준 것이라고라?'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경진을 멀거니 보던 설종의 표정이 순식간에 확 밝아졌다.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처럼 반가운 칭찬에 왠지 눈물이 솟을 만큼 가슴이 뛰었다. 하얗고 고른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는 그녀를 경진이 두 눈을 깜빡이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그를 가까이 마주보언 설종은 안경너머 경진의 눈동자를 흘끔거렸다.
 '색깔이.....이상해. 검은색이 아니고 하늘색, 보라색, 연두색이 섞여 있어.'
 한국인답게 당연히 검은색인 줄 알았던 눈동자가 오묘한 무지개 빛깔이란 것을 발견하자 설종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혼혈인가?'
 그녀가 그런 생각에 빠진 사이 경진이 몸을 돌리더니 스테이션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김현아 환자 차트 줘 봐."
 "네, 샘."
 다행히 위 절제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나온 현아는 지금 내과 중환자실에 입원 중이었다. 그녀의 차트를 살피며 몇 가지 기록하던 그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슈처 준비하고 글러브 좀 준비해."
 "네, 샘. 글러브 팔(8) 쓰시죠?"
 설종이 그렇게 말하며 뛰어가자, 경진이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다. 보통 7이나 7반을 쓰는 남자들과 달리 손가락이 굉장히 길고 손이 큰 편인 경진은 8호를 썼다. 그런 소소한 사실까지 설종이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자 그의 가슴 언저리가 찌릿해지더니 새삼 동욱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인턴 때부터 열렬히 짝사랑했다고 하더라. 네가 안 받아준다고 펑펑 울더라.'
 머릿속을 울리는 동욱의 목소리를 쫓으려는 듯 경진이 고개를 털며 이마를 찡그렸다. 그러나 글러브 껍데기를 찢어 소독 트레이에 떨어뜨리는 설종의 마음은 그의 설렘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으니.
 '이 자식은 산적같이 비아그라 손만 더럽게 커 가지고서는! 쨔샤! 네놈은 밥 처먹고 손발만 키웠냐? 네 솥뚜껑같이 큰 손을 내가 잊어버리려고 해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누군 6반 쓸 만큼 손이 섬세한데.........'
 착각에 빠진 경진은 꿈에도  몰랐지만 설종의 솔직한 속마음은 그랬다. 치토스 박 치프의 귀족같이 아름답고 가느다란 손을 다시금 떠올리던 설종이 한숨을 삼켰다. 정말 잊기로 마음먹었는데, 가끔씩 솟구치는 그리움은 허락도 안 받고 그녀를 괴롭혔다.
 경진은 현아의 입에 꽂힌 인공호흡기 모니터를 잠시 살핀 뒤 그녀의 CV 카테터를 새 것으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외과를 하지, 왜 내과를 지원했을까?'
 능숙한 손놀림으로 봉합을 하는 경진을 보고 설종은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커다란 손이었지만 믿을 수 없을 만큼 세심하고 재빠르게 움직였다. 경진의 쭉 뻗은 긴 손가락은 말할 수 없도록 매혹적이었다. 설종이 도저히 눈을 떼지 못할 정도였다.
 봉합을 마친 경진은 글로브를 벗더니 물을 적신 거즈로 현아의 얼굴을 조심히 닦아주었다. 그 차가움에 잠시 눈을 떴던 현아가 경진에게 눈길을 주더니 다시 잠에 빠져버렸다. 아련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는 경진의 옆모습이 어쩐지 슬퍼보였다.
 '콧날이, 잘 섰네. 입술 선도 또렷하고.'
 경진의 옆얼굴을 훔쳐보던 설종은 약간이지만 감탄했다.
 '저렇게 또라이만 아니면 여자도 좀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콧날이 시큰해지며 치프가 조금 불쌍했다. 인간은 인간다워야 짝이 생기는 법. 그렇게 앉아 있던 경진이 몸을 일으키더니 설종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 환자, 잘 보고 이상 있으면 노티해. 내일은 벤틸레이터 위닝 시작해야겠어."
 "네, 샘."
 "수고해."
 경진이 중환자실을 나가자 설종은 누운 현아를 새삼 물끄러미 보았다. 파란 혈관이 비칠 만큼 하얀 얼굴, 크고 맑은 눈동자, 붉고 예쁜 입술.
 '이런 타입을 좋아하는 구나.'
 경진이 그렇게 정감 있는 눈빛으로 누군가를 보는 모습은 처음이었던 설종이라 어쩐지 현아에게 눈길이 갔다. 문득 자신이 준 초콜릿을 경진이 현아에게 주었던 일이 생각나자 설종은 살짝 기운이 빠졌다. 그런 자신이 우스웠던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아까하다 말았던 검사지 정리를 마치러 스테이션으로 돌아갔다.